절반의 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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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나님께 묻다 2. 자기 마음대로 결정하다 3. 절반만 순종하다 4. 그럼에도 함께 하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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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함께 나눌 말씀인 사사기에 대해 나누기 전에 우리 간단히 사사기의 배경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사기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세 가지를 먼저 알아야 하는데요.
그것은 ‘사사란 무엇인가?’, ‘가나안 족속의 신들’. ‘베들레헴’이에요.
첫째, 사사기는 사사들의 이야기를 기록해 놓은 책이고, 사사는 통치자, 군사적 구원자는 뜻을 갖고 있어요.
이스라엘은 신정통치의 나라. 인간 왕이 따로 없는, 오직 하나님이 왕이 되시고,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나라였어요.
사사는 엄연히 왕은 아니에요.
다만 이스라엘이 죄로 인해 고통에 빠져 힘들어 할 때, 하나님께서 주신 힘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해준 사람들이에요. 하나님의 사람들.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사들이지만 이들 중에서도 타락한 사사들이 있었어요.
두 번째 가나안 신들이에요.
하나님께서 광야 생활 동안 이스라엘에게 계속해서 가르치셨고, 훈련시키셨던 것은 우상숭배를 하지 않는 것이었어요.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서 가나안의 신들을 따르지 않기를 바라셨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헤렘’ 전쟁을 하도록 하셨어요.
헤렘은 ‘그 땅에 원래 아무 것도 살지 않았던 것처럼, 다 없애버려라'라는 뜻을 갖고 있어요.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왜! 가나안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기회조차 주지 않으시고, 다 죽이라고 하셨을까?”
“사랑의 하나님께서 왜 가나안을 지도 위에서 지워버리라고 하셨을까.”
우리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어요.
하나님께서 가나안 사람들을 지도에서 지워버리라고 하셨던 이유는 가나안 종교 제도 때문이에요.
가장 대중적인 신은 비와 천둥의 신인 엘이라는 신의 아들인 바알이었어요.
바알은 ‘주인’, ‘소유자’라는 의미를 갖고 있었어요.
바알은 땅과 가축과 인간의 생식을 주관한다고 여겨졌어요.
그리고 두 여신 아세라와 아스다롯은 바알의 배우자로 등장하는데, 가나안 사람들은 아세라와 아스다롯을 하나로 보기도 했어요.
또한 가나안 사람들은 바알과 아세라 뿐만 아니라 수많은 신들을 숭배했어요.
바알 숭배가 취했던 방식은 ‘공감 의식’이에요.
숭배자들은 성적인 행위가 바알과 아세라를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정말 문란하고 타락한 행동들을 많이 했었어요.
그리고 가장 높은 곳에서 이 일들을 했어요.
왜냐하면 가장 높은 곳에서 숭배를 하면 바알과 아세라가 잘 들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거든요.
가나안 제사의 문제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도 않았다는 것에 있어요.
하나님께서 세워놓으신 아름다운 가족관계와 성에 대한 모든 것들을 다 무너뜨린 것이죠.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모든 일들을 했던 것이죠.
소돔과 고모라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불로 지도에서 지워졌던 이유도, 그들이 성적으로 타락했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하고 살았기 때문이에요.
세 번째, 베들레헴이에요.
베들레헴은 사사기 17-21장에서 7번이나 등장해요.
사사기의 마지막 두 이야기는 죄의 중심 무대인 베들레헴 안이나 그 근처에서 일어났어요.
베들레헴은 소돔과 고모라처럼 엄청나게 타락한 곳이었어요.
가나안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우상 숭배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베들레헴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예수님이 떠오릅니다. 다시 말해 우리에게 굉장히 긍정적인 지역이 바로 베들레헴입니다.
하지만 당시 베들레헴은 가장 타락했던 곳이었어요.
이스라엘은 가나안의 우상 숭배를 그대로 따라합니다. 그리고 베들레헴을 타락한 도시로 만들었습니다.
그들의 우상 숭배와 타락결국 광야에서처럼 고난과 고통의 시간에 빠지도록 만들었어요.
그리고 고난과 고통 속에서 힘들어하며 하나님을 찾을 때마다, 하나님은 사사를 보내셔서 그들을 구원해주셨어요.
하지만 이스라엘은 또 죄를 짓고, 고난을 받고, 회개하고, 다시 구원을 받아요. 이게 사사기의 큰 흐름입니다. 이 세 가지를 기억하고 계신다면 후에 사사기를 묵상할 때 큰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오늘 나눌 말씀의 제목은 ‘절반의 순종’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절반의 순종을 보였습니다.
절반의 순종. 이건 순종을 한 것도 아니고 안한 것도 아닌 굉장히 애매한 순종을 뜻하는 말이죠. 우리 함께 읽었던 사사기 1장 1-3절을 함께 보도록 하겠습니다.
가나안 정복시기에 가장 큰 역할을 했던 지도자 여호수아가 죽었습니다. 모세와 여호수아 이 두 명의 지도자는 어떤 일을 하기 전에 늘 하나님께 물었어요. 그리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고 그대로 순종했죠.
1절을 보면 이스라엘도 그렇게 하나님께 묻고 있어요.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 우리 가운데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족속과 싸우리이까.”
그들도 모세와 여호수아처럼 하나님께 먼저 물으며, 일들을 진행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들의 질문에 여호와 하나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유다가 올라갈지니라 보래 내가 이 땅을 그의 손에 넘겨 주었노라
하나님께서 유다가. 유다지파만 올라가서 싸우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지파가 아닌 유다 지파를 콕 집어서 말씀하셨어요.
그리고 “내가. 나 하나님이" 이 땅을 그의 손. “유다의 손"에 쥐어주었다고 말씀하셨어요.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은 ‘유다가 순종하여 올라가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완벽한 승리를 보장해주겠다.” “너는 무조건 승리한다.”라는 것이죠.
하나님은 이미 유다가 전쟁에서 이길 수밖에 없도록 모든 것들을 다 계획해 두셨어요. 그랬기 때문에 “유다야 가서 싸워라!”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죠. 아주 노골적으로 “이미 이긴 싸움"이라고 말씀하고 계셔요.
여러분 그럼 유다 지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께서 확신을 가지고 ‘너는 이미 이겼어’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럼? 그냥 전쟁에 나가면 되겠죠?
하나님이 싸워주신다는데, 뭐가 걱정이고 무섭겠어요.
그런데 유다 지파가 이상한 행동을 해요.
3절이에요. “유다가 그의 형제 시므온에게 이르되 내가 제비 뽑아 얻은 땅에 나와 함께 올라가서 가나안 족속과 싸우자 그리하면 나도 네가 제비 뽑아 얻은 땅에 함께 가니라”
무조건적인 승리에 대한 확답을 받은 유다가 지금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갑자기 옆에 있는 시므온에게 같이 싸우자고 제안하고 있어요. 굉장히 당황스러운 장면입니다.
이렇게 마음대로 올라가서 싸울거면, 차라리 하나님께 묻지를 말던지, 하나님께 물어서 대답을 들어놓고선, 결국 자기 하고 싶은데로 하고 있거든요.
유다지파는 큰 지파였을 뿐만 아니라 전쟁에 나갈 사람들도 정말 많습니다.
그런데 지금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의 말씀은 기억하지도 않고 자기 멋대로 행동하고 있습니다.
이거 어디서 많이 본 모습이지 않습니까? 곰곰이 생각하면 이 모습, 우리 모습과 비슷합니다.
답정너라는 말이 있죠.
이미 답은 정해져있는거에요.
유다는 원래부터 시므온이랑 같이 전쟁을 할 생각이었어요.
하나님께 예의상 물은거에요. 하나님의 대답이 자기가 생각했던 것이랑 같건 다르건 유다에게는 중요하지 않았어요.
유다는 이미 답을 정해놨거든요.
우리도 이런 모습을 갖고 있어요.
이미 답을 정해놓고 사람들을 대할 때가 많아요. 때로는 계산적으로 사람에게 다가 갈 때도 있죠.
상대가 내가 원하는 반응이나 대답을 하지 않으면, 결국 무시하고 내가 생각했던 대로 결정하고 행동해요.
내가 하고 싶은데로 하는 것이죠.
내 생각이랑 다르면 그들의 의견을 모른척 하며, 내가 내린 답과 결론대로 행동하는 것 우리들도 이런 모습을 갖고 있어요.
하나님께 기도해요.
하지만 이미 내 생각과 행동은 정해져 있어요.
결론을 정해놓고 기도할 때가 많아요.
저는 대학생일 때 CCC라는 기독교 동아리를 했었어요.
그때 동아리 간사님께서 늘 동아리원들에게 하시던 말씀이 있었어요.
“4학년 2학기가 될 때까지 이성교제는 금지한다. 4학년 1학기 때까지 훈련을 충분히 받고 이성교제를 해라.”
이게 잘 될까요? 같이 여러 활동을 하다 서로에게 마음이 생겨요. 그래서 고민을 하다가 간사님에게 찾아가요.
간사님은 이렇게 말씀하세요. “그러면 너희 기도해봐. 기도해보고 정말 이게 하나님의 뜻이다.라는 감동이나 사인이 오면 그때 다시 찾아와.”
기도가 될까요?
이미 서로가 서로에게 마음을 표현했고, 좋아하는 마음이 차고 넘치는데 무슨 기도가 될까요. 이미 답을 정해놓고 하는 기도 인것이죠.
“하나님 저 자매와, 저 형제와 제가 교제를 해도 괜찮을까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짝이 맞을까요?”
“하나님 저에게 사인을 주세요. 마음의 감동을 주세요.”
이렇게 기도는 하지만 이미 답은 정해져있습니다.
상대가 하는 모든 행동이 기도 응답이고 하나님의 뜻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이미 결론을 내리고 기도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처럼 이스라엘은, 특히 유다는 답을 정해놓고 기도했어요.
그런데 문제는 유다만 답정너가 아니었다데에 있어요. 모든 이스라엘이 다 그랬어요.
순종해야 복을 받고, 순종해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을 지난 40년 동안 수도 없이 경험해놓고,
가나안에 들어오자마자, 은근히 때론 대놓고 하나님 앞에 불순종을 하기 시작해요.
가나안 전쟁은 헤렘이라고 서두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모든 것들을 다 없애고, 지도에서 가나안 족속들을 지워버리는 전쟁을 해야 했던 이스라엘이었는데, 정말 헤렘 전쟁을 했을까요?
하나님께서 유다지파만 가라고 했는데, 유다는 시므온이랑 같이 가요. 완전한 순종이 아닌 절반만 순종을 했어요. 그럼에도 전쟁에서 승리했어요.
첫 전쟁도 절반의 순종을 했던 유다는,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도 절반의 순종을 해요.
하나님께선 유다에게 ‘승리’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어요.
유다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시므온이랑 같이 전쟁을 했어도, 약속 하셨기 때문에 다 승리할 수 있도록 하셨어요.
그런데 유다가 한 전쟁에서 멈췄어요.
19절을 볼까요? ‘여호와께서 유다와 함께 계셨으므로 그가 산지 주민을 쫓아내었으나, 내었으나, 골짜기의 주민들은 철 병거가 있으므로 그들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며
19절이 어떻게 시작하고 있나요? 여호와께서 유다와 함께 계셨으므로! 하나님이 함께 하셨어요. 그럼 무조건 이기는 싸움이에요. 근데 유다가 이상하게 전쟁을 멈춥니다.
왜냐하면 적들에게 철병거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에게는 창과 활 그리고 검밖에 없는데, 골짜기에 사는 사람들은 철병거가 있었던 것이죠.
유다는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는데, 겁을 잔뜩 먹었습니다. 자신들을 절대 이길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전쟁에서 멈춰버린 것이죠.
이스라엘이 정말로 철병거와 싸워서 이길 수 없었을까요?
유다지파가 철병거가 있는 사람들이랑 싸우면 질 수밖에 없었을까요?
아닙니다.
사사기 5장을 보면 철병거를 가진 부족과 싸운 드보라와 바락의 노래가 나와 있는데, 그들의 노래를 보면 철병거? 좋은 무기?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드보라와 바락이 하나님과 함께 해 철병거를 가진 부족과 싸울 때, 이스르엘 평야라는 곳에서 싸웠습니다.
철병거에 비해 분명 전력도 밀리고 이기기 어려운 싸움이었는데,
그들이 하나님을 의지하며 전쟁에 나섰더니,
갑자기 비가 왔고 동서로 가로지르는 기손강이 넘쳐서, 평야 전체가 습지로 변해버렸습니다.
그래서 철병거가 습지에 빠져서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고, 드보라와 바락은 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이처럼 철병거와 같이 겉으로 보기에는 상당히 강해보이고 무서운 무기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면 그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버립니다.
하지마 유다는, 19절에 기록된 것처럼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는데도 불구하고 더 이상 전쟁을 하지 않았습니다.
첫 전쟁을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함으로, 하나님만 의지함으로 멋지게 전쟁에 승리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었어야 하는 유다 지파가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기 시작하니까, 다른 지파들도 줄줄이 줄을 이어서 절반만 순종하기 시작합니다.
베냐민은 여부스 족속을 쫓아내지 못합니다.
요셉 가문도 자신들을 도와준 가나안의 한 가족을 살려주었습니다.
므낫세 지파도, 에브라임도, 스불론도, 아셀도 납달리도 모든 지파가 가나안 족속들을 다 쫓아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조건 이긴다고 말씀하셨고, 다 진멸하라고 하셨는데, 적당히 싸우고 빠져버렸습니다.
도미노 현상과도 같습니다.
가장 크고 영적 장자인 유다 지파의 절반의 불순종모든 지파의 불순종으로 나타났고,
결국 이스라엘은 가나안 족속과 함께 공존하며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완전한 정복에 실패해 버렸습니다.
이스라엘이 정복 전쟁에 실패한 이유는 그들이 영적으로 타락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정복 전쟁은 단순하게 땅을 차지하고 거기에서 터전을 만들고 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노예에 불과했던 그들을 광야로 끌어내셨습니다.
비록 40년간 광야에서 떠돌았지만, 그들은 그 시간동안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따라가는 훈련을 받았습니다.
40년간 받은 그 훈련의 결과가 바로 약속의 땅을 차지하는 것이었어요.
하나님의 말씀대로 헤렘. 모든 것을 진멸하는 전쟁을 통해, 하나님을 정말로 신뢰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하나님이 주신 땅을 포기했습니다.
가나안 족속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이지 않고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모든 부분에서 타락했던 것처럼 이스라엘도 결국 타락해 버렸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정말 싫어하시는 우상 숭배와 타락한 가나안의 종교들을 따라가는데 최선을 다하기 시작합니다.
40년이라는 훈련을 왜 받았는가? 싶을 정도로. 여호수아가 떠나자마자,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자신들이 하고 싶은데로 살아갑니다.
이스라엘이 정말 못된 것은, 불순종하고 멋대로 살려면 그냥 그렇게 살면 되는데, 하나님은 기억합니다. 그렇게 멋대로 살아가면서 그래도 꾸역꾸역 하나님을 섬기려고 합니다.
희망고문 하는 것도 아니고, 한 발은 하나님에게 걸쳐놓고, 묻기는 합니다.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척합니다. 하지만 결국 자기 하고 싶은데로 행동합니다.
저는 어쩌면 이런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해 봅니다.
벌써 12월이 되었습니다. 올해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정말 알 수 없을정도로 빠르게 시간이 흐른 것 같습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12월 첫주가 되어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제2가족 여러분 올 한해 설교를 몇 번 들었는지 혹시 알고 계십니까?
주일예배만 참석했다면 오늘까지 49번의 설교를 들었을 것이고,
수요예배도 참석 했다면 97번, 새벽, 금요 설교까지 포함하면 정말 많은 말씀을 듣고 나누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저에게 묻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수없이 들었던 그 설교와 말씀이 저와 여러분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며 살아가고 있었나요?
그 말씀들이 우리의 삶을 바른 방향으로 이끌어가고 있었습니까.
어쩌면 우리도 지금까지 절반의 순종을 해 왔을지 모릅니다.
혹시 한주를 지내는 동안 찬양을 듣거나 부르시나요?
듣거나 부르는 찬양이 마치 하나의 음악처럼 흘러가거나, 그 내용을 깊이 있게 묵상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송하지만 그냥 가요를 듣는 것처럼 듣고 흘러가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찬양의 가사에 집중하고, 이 가사가 무엇을 의미할까?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 찬양을 통해 주시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그것을 고민하는 시간이 없다면, 귀에 흘러가는 하나의 노래와 같을 수도 있습니다.
삶의 여러 부분에서 우리는 절반의 순종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제가 좋아하는 찬양들 중 “시간을 뚫고"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이 찬양의 가사가 저에게 참 많은 울림을 주었는데요. 찬양의 가사는 이렇습니다.
당신은 시간을 뚫고 이 땅 가운데 오셨네.
우리 없는 하늘 원치 않아 우리 삶에 오셨네.
자신의 편안 버리고 우리게 평안 주셨네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우리 삶에 오셨네
하나님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시네
꿈 없는 우리게 그 나라 보여주시네
연약한 자들의 친구가 되어주시고
힘 없는 우리의 인생을 위로 하시네
이스라엘이 절반의 순종을 보이며 살고,
답정너의 인생을 살아도.
그들이 우상 숭배하고 하나님을 멀리해도,
하나님은 그들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에게 아무리 말해도 말해도 듣지 않고 무시하니까,
결국 하나님께서 스스로 신의 자리를 포기하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저와 우리가 절반의 순종을 보여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인 것처럼,
기도의 사람인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지만
결국엔 절반의 순종을 보이는 우리들로 인해,
예수님은 “자신의 편안을 기꺼이 내던져버리고 이 땅에 오셔서 죽으셨습니다.”
“자신의 편안을 포기하고 우리에게 평안을 주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곧 우리는 성탄절을 맞이하게 됩니다. 절반의 순종을 보이며 살아가고 있지만, 그럼에도 우리를 포기할 수 없으셨던 그 분께서 정말 인간이 되어 이 땅에 오신 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제2가족 여러분.
우리 절반의 순종 이제 그만하기로 함께 결단하기를 소망합니다.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베야한다는 말처럼,
예수님께서 나 때문에 죽으셨고, 내 죄가 용서 받아졌고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정말로 믿는다면,
우리 무라도 베어야 합니다.
더 이상 절반의 순종이 아니라, 정말 순종하려는 마음을 갖고, 매일 순종해야한다는 의식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물론 순종하려고 하는데 잘 되지 않아 넘어질 수 있습니다. 넘어져 상처 받는 것이 두려울 수도 있습니다.
넘어져도 괜찮고, 쓰러져도 괜찮습니다.
하나님은 자신과 함께 하기 위해 몸부림치며 넘어지는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계시지 않을 것기 때문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순종하고자 하는 의지를 담은 마음입니다.
처음부터 답을 정해놓고 포기해서 넘어지는 것과, 순종하려고 의식하면서 살아가다 넘어지는 것정말 큰 차이가 있습니다.
이번 한 주 살아가면서, 나는 절반의 순종을 하고 살아가고 있지 않았는가? 생각하고 돌아보는 저와 여러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곧 다가 올 성탄절을 기다리며, 그분께서 나를 위해 이 땅에 오셔서 치뤄내신 희생을 기억하며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이번 한주 절반의 순종을 벗어나, 절반의 절반의 순종을. 또 그 절반의 절반의 순종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살아내실 수 있는 은혜와 강한 힘과 능력을 모두의 삶에 더해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소망하며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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