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가고 싶은 삶의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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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가고 싶은 삶의 지혜 / 내 삶에 자족하며 남을 위로하며 살아가는 더불어 사는 삶이 지혜로운 삶이다.
여러분, 지난 수련회때 보았던 ‘오베라는 남자’ 영화를 기억하시나요?
그는 고집불통이고, 괴팍하고, 불만과 잔소리가 끝없는 사람입니다.
이웃이 인사해도 인사도 안 받을 정도로 온 동네에 소문난 프로 불친절러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일생을 보면 그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철도회사에서 근무하시던 아버지는 오베가 받은 성적을 보고 기뻐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자랑하려고 뛰어가다가 어이없이 기차에 치여 죽었습니다.
엄마는 어릴적 일찍이 돌아가셨구요.
그런데 그 뒤 아무 잘못도 없는데 국가에서 각종 트집을 잡아 유일한 재산인 집을 철거하려고 합니다.
끝까지 막으려 했지만 결국 막지 못하고 집이 불타 버립니다.
그 때도 옆집에 불이나 갇힌 사람을 구하려다, 정작 자기 집은 구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 뒤 빈털털이가 되어 기차에서 자다가 우연찮게 아름다운 여성을 만나 결혼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제 좀 편안하게 살려나 했는데 임신한 아내와 여행갔다가 사고로 관광버스가 뒤집어집니다.
그 바람에 임신한 아내는 아이를 잃고 하반신 마비가 되어버렸습니다.
세상은 그런 아내가 교사로 일하는 것도 잘 허락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아내는 암으로 죽었고, 그는 40년 넘게 일한 직장에서 갑자기 짤리게 됩니다.
오베는 평생 성실하고 올바로 살아왔지만 자기 삶에 남는게 없는 것처럼 느꼈습니다.
모든 게 자기 마음대로 되는 게 없었기 때문이죠.
차라리 자신이 아무런 수고도 안했는데 우연히 만난 아내가 자신에게 가장 큰 보람이었죠.
그렇다보니 그에게 이 세상은 모든게 불합리하고, 부조리해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니 전도서에 나온 말처럼 ‘헛되고 헛되다, 헛되고 헛되다. 모든 게 헛되다.’라고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허무함을 느낀 그가 선택한 마지막 방법은 자살이었습니다.
문제는 자기가 죽으려 할 때마다 우연히 이웃들이 개입해서 쉽게 죽지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옆집에 이사온 이란 출신의 여자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웃들 삶에 개입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러면서 그는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따뜻한 것인지 깨닫게 됩니다.
한명의 가족도 남지않은 외로운 오베였지만 그의 장례식은 많은 이웃들이 함께한 따뜻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도 잘보면 이런 부조리가 판치는 세상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세상 속에서 우리가 이웃들과 더불어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볼 전도서는 이런 차가운 세상 속에서 어떻게 더불어 따뜻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를 깨닫게 해줍니다.
[본론]
첫째, 하나님은 우리를 위로자로 살게 하십니다.
1절입니다.
나는 또 세상에서 벌어지는 온갖 억압을 보았다. 억눌리는 사람들이 눈물을 흘려도, 그들을 위로하는 사람이 없다. 억누르는 사람들은 폭력을 휘두르는데, 억눌리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사람이 없다.
전도자는 세상을 돌아보니 힘없는 사람들이 억압받는 것을 보았습니다.
힘을 가진 사람들이 약자들에게 폭력을 휘두르며 학대하는 것입니다.
약자들이 어떤 잘못을 해서 그런게 아니라 그냥 억울하게 학대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도자가 말하고자 하는 포인트는 억압 그 자체가 아닙니다.
그것보다 더 큰 문제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이런 학대받는 자들과 함께 울어주며 위로해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학대받는 사람들의 모습이 얼마나 안타까웠던지 전도자는 차라리 그들이 태어나지 않았다면 더 복됐을 것이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그럼 왜 이렇게 세상이 각박해진 것일까요?
성경은 이를 죄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원래 인간은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과 함께 있을 때 부족하지 않게 넉넉한 공급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무한하시고 풍성하신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죄로 인해 하나님 아버지와 분리되면서 인간은 “궁핍”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이제 인간은 이 땅의 유한한 자원을 더 많이 갖기 위해 서로 경쟁하며 다투며 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유한한 자원과 더 가지려는 욕심때문에 인간은 여러가지 고통을 겪게된 것입니다.
이런 인간의 고통을 가장 많이 받는 사람들이 바로 세상에서 소외된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게을러서 혹은 머리가 나빠서 세상에서 소외된 게 아닙니다.
단지 죄로 인해 왜곡된 세상 시스템이 그들을 이렇게 만든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인간의 욕망이 계속되는 한 이런 소외된 사람들이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아마 이 땅에 있는 한 빈부격차 같은 것은 절대로 해소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 이런 세상 속에서 우리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물론 우리는 이런 죄로 인해 왜곡된 세상 시스템을 바꾸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욕망이 제거되지 않는 한 이런 노력은 결국 한계를 드러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세상에서 소외된 사람들의 고통을 공감하고 위로해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공감과 위로의 본을 보이신 분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4장에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 그녀의 삶을 공감하고 위로해주셨습니다.
지금까지 그녀를 거쳐간 남편이 5명이나 될 정도로 삶이 복잡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마을 사람들을 피해다니는 아싸가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여인의 죄를 책망하시지 않고 그녀의 고통을 공감하고 위로해 주셨습니다.
이 여인을 배려해 제자들을 미리 마을로 보내시고, 혼자 우물가에서 그 여인을 만나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그 당시 사회적 약자였던 가난한 자, 병든자, 소외된 자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종교적 위선과 폭력을 일삼는 자들에게는 분노하시고, 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12장 15, 16절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15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16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
저는 이번에 이태원 참사때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사건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놀란 것은 그 뉴스에 달린 댓글때문이었습니다.
어떤 뉴스의 댓글을 보니 사람들이 희생자들에 대해 전혀 공감과 위로가 없었습니다.
자기가 놀고 싶어서 갔다가 죽었는데 왜 내 세금을 그 유족들에게 주느냐며 비난했습니다.
그런 댓글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마음이 메마르고, 위로가 없는 비정한 사회를 본 듯하여 너무나 안타까웠습니다.
이런 각박한 세상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예수님처럼 세상에서 눈물흘리고 아파하는 자들을 공감하고 위로할 수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도 분명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들의 아픔을 공감하고, 위로해줄 수 있다면 그 순간 우리는 작은 예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위로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을 하면 분명 지금 내 코가 석자인데 남을 위로할 여유가 없다는 말을 하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내가 너무 바쁘고 마음이 복잡한 데 어떻게 남의 아픔을 귀기울여 들을 수 있겠습니까?
자기 마음의 여유가 없는 사람은 남을 공감하거나 위로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둘째, 하나님은 우리를 자족하며 살게 하십니다.
4절입니다.
온갖 노력과 성취는 바로 사람끼리 갖는 경쟁심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나는 깨달았다. 그러나 이 수고도 헛되고,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다.
전도자는 사람들 사이에 만연해 있는 경쟁을 주목합니다.
그는 인간의 노력과 성취들이 그 마음 속에 있는 경쟁심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을 꽤뚫어 보았습니다.
분명히 건전한 경쟁은 문명의 진보와 성취, 번영을 가져옵니다.
그러나 경쟁은 이웃에게 시기심을 불러 일으키기도 합니다.
누군가 더 많이 더 높이 올라가려 할수록 다른 누군가는 더 적게, 더 낮아질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시기심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내가 시기하는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다보니 어느 순간 본질은 잊어버리고 경쟁자를 앞지르려는 이기적인 동기만 남아 더 치열하게 경쟁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무한경쟁은 과다한 노동과 수고로 이어져 결국 우리 삶에 안식과 평안을 빼앗아 가 버립니다.
그러므로 전도자는 이런 수고도 헛되고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에서 인류 최초의 살인으로 여겨지는 가인과 아벨 사건이 바로 이 경쟁심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창세기 4장에 기록된 이 사건은 농사를 짓는 가인과 목축을 하는 아벨 사이에 일어난 일입니다.
가인은 자신이 지은 농작물을 하나님께 드렸고, 아벨은 목축한 양의 첫 새끼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아벨의 제물은 받으시고,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습니다.
그러자 가인은 몹시 화를 내며 결국 동생 아벨을 죽여버렸습니다.
그의 과도한 경쟁심이 결국 동생을 희생시켜버린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사울과 다윗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울이 다윗을 미워하게 된 계기는 사람들이 외치는 함성 때문이었습니다.
사울이 전쟁터에서 죽인 사람은 천천이고, 다윗이 죽인 군사는 만만이라고 말했습니다.
다윗이 훨씬 용맹하고 많은 성과를 거뒀다는 말입니다.
이에 사울은 시기 질투하여 어떻게든 다윗을 제거하려고 했습니다.
이처럼 과도한 경쟁심은 마음에 평안을 빼앗아가고 누군가를 희생시키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그럼 우리는 이 경쟁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5절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팔짱을 끼고 앉아서, 제 몸만 축낸다"
일을 안하고 팔짱이나 끼고 앉아있으면 파멸에 이르게 된다는 게으름에 대해 경고하는 속담입니다.
아에 경쟁에서 벗어나 자포자기한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이런 사람을 게으른 사람,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어리석은 사람의 최종 종착지는 자기 파멸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방법은 그게 아닙니다.
6절입니다.
적게 가지고 편안한 것이, 많이 가지려고 수고하며 바람을 잡는 것보다 낫다.
이 구절을 다른 성경에 보면 이렇게 표현합니다.
두 손에 가득하고 수고하며 바람을 잡는 것보다 한 손에만 가득하고 평온함이 더 나으니라
두번째 번역이 우리에게 더 와닿는것 같습니다.
두 손 가득 쥐려고 욕심내기보다 한 손만 쥐고 다른 한 손에는 평안함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요즘 말로 표현하자면 워라밸을 중시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성경이 말하는 워라밸은 자신만을 위한 그런 게 아닙니다.
내가 10개 다 가져갈 수 있지만 5개만 가져가고 이웃을 위해 5개는 남겨두는 삶의 태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욕심많은 아이들보면 두 손에 가득 과자나 장난감을 들고 있을 때가 있습니다.
아무한테도 안 빼앗기려고 욕심내는 모습인데 이 모습이 마치 우리와 같다는 것입니다.
과도한 경쟁심으로 많은 성과를 이루려고 하다가 정작 중요한 것을 망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에 자포자기한 것도 위험하고, 과도한 경쟁심도 위험합니다.
그냥 자족하는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나도 살리고, 남도 살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서로에게 위로자가 되어줘야 한다, 그리고 자족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 두가지가 최종적으로 가리키는 삶의 방향은 무엇일까요?
마지막 셋째, 하나님은 우리를 이웃으로 살게 하십니다.
이 점을 설명하기 위해 전도자는 한 남자의 예를 듭니다.
8절입니다.
한 남자가 있다. 자식도 형제도 없이 혼자 산다. 그러나 그는 쉬지도 않고 일만 하며 산다. 그렇게 해서 모은 재산도 그의 눈에는 차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는 가끔, “어찌하여 나는 즐기지도 못하고 사는가? 도대체 내가 누구때문에 이 수고를 하는가?”하고 말하니, 그의 수고도 헛되고, 부질없는 일이다.
전도서는 가족이 없는 독신남을 말하지만 자기 성취만을 위해 주변을 돌보지 않는 사람의 예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평생 일만 죽으라해서 많은 재산을 모았지만 결국 허무한 마음만 들었다는 것입니다.
몸과 마음 다 망가지고, 주변 사람들 다 떠나고 홀로 남아 하는 독백이 등장합니다.
“어찌하여 나는 즐기지도 못하고 사는가? 도대체 내가 누구때문에 이 수고를 하는가?”
자신만을 위해 많은 수고를 하며 살아왔지만 결국 마음의 평안과 기쁨을 다 잃어버린 자의 고백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9-12절입니다.
혼자보다는 둘이 더 낫다. 두 사람이 함께 일할 때에,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하나가 넘어지면, 다른 한 사람이 자기의 동무를 일으켜 줄 수 있다. 그러나 혼자 가다가 넘어지면, 딱하게도, 일으켜 줄 사람이 없다. 또 둘이 누우면 따뜻하지만, 혼자라면 어찌 따뜻하겠는가? 혼자 싸우면 지지만, 둘이 힘을 합하면 적에게 맞설 수 있다.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함께 나아가는 삶이 지혜로운 삶이라는 말입니다.
삭막한 세상 속에 우리를 보내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 바로 또하나의 가족, 교회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하나님이 이 세상에 심으신 위로의 공동체, 자족하는 공동체, 함께 나누며 나아가는 공동체인 것입니다.
티벳의 훌륭한 그리스도인이던 썬다싱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눈보라 치는 추운 겨울 길, 한 사람이 눈 속에 쓰러져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죽지 않았으니 데려가자고 하는데 옆에 있던 사람은 우리도 힘들고 위험하다며 혼자 가버립니다.
선다 싱은 쓰러진 그를 외면하지 못해 업고 갑니다.
가다보니 홀로 앞서 간 사람이 길바닥에 쓰러져 얼어 죽었습니다.
하지만 등에 업힌 사람과 선다 싱은 서로의 체온으로 몸이 덥혀졌고 추운 줄 모른 채 마을까지 도착하여 둘다 살 수 있었습니다.
삭막한 이 세상 혼자서도 잘 살 거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힘들어하고 고통가운데 있는 이들을 등에 업으면 그 사람도 살고 나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회의 타락을 체크하는 리트머스 시험지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소외된 자들을 어떻게 대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당시 대표적인 소외된 자들, 억압당하는 자들이 고아와 과부, 나그네, 이방인이었습니다.
아무 의지할 곳이 없는 외로운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 공동체가 함께 그들을 돌보지 않을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타락했다고 보시고 심판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사회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얼마나 세상의 소외된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고 있습니까?
[결론]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제가 처음 말씀드린 ‘오베라는 남자’의 주인공 오베는 부조리한 세상으로부터 많은 상처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세상에 마음을 닫고 자기 세계에 갇혀 소외되어 버린 것이죠.
그런데 그가 점점 자신의 상처에서 벗어나 이웃의 상처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그 계기가 무엇이냐면 ‘자신에게 유일한 선물과도 같았던 사랑하는 아내 소냐라면 어떻게 했을까?’라는 질문을 자꾸 던진 것입니다.
그는 이 질문때문에 점점 다른 선택들을 하게 되었고, 남의 상처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남의 상처를 도와주다보니 자신의 상처를 치유받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원래 이웃에게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내가 사랑하는 주님이라면 어떻게 했을까’라는 질문이 우리의 선택을 바꾸지 않을까요?
또한 우리가 이웃에게 관심을 갖으면 누구보다도 더 큰 유익을 누리는 사람은 우리 자신일지 모릅니다.
그것이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행복한 비밀입니다.
아프리카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빨리 가고 싶으면 혼자가라 그러나 멀리 가고 싶으면 함께 가라’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세상 사람들 다 빨리가려 할 때 오히려 멀리가는 삶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런 우리 다카포 식구들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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