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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설교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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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많은 반성과 후회를 하며 살아갑니다. 특별히 신앙인은 하나님 앞에서도 많은 실수를 하고, 실수를 바탕으로 반성과 후회를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 앞에서 (때론 눈물을 흘리며) 반성하고 후회하는 것,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말씀드리는 것, 우리는 이를 두고 ‘회개’라고 말합니다.
요한복음 9:12 “사람들이 눈을 뜨게 된 사람에게 묻기를 “그 사람이 어디에 있소?” 하니, 그는 “모르겠소” 하고 대답하였다.”
Today the religious situation cries out for the skilled moral physician who can diagnose our ills and prescribe wisely for our cure. It is not enough simply to repeat correct doctrinal cliches. It is imperative right now that we have the benefit of the piercing discernment of the Spirit. We must not only know what God has said; we must hear what God is now saying,
1 Chronicles 12:32; Isaiah 1:3–4; Jeremiah 9:12
The Size of the Soul, 111.
A. W. 토저 (A. W. Tozer)
Atonement must be secured by someone who is both human and divine for the sacrifice rendered to be efficacious.442 The offering through “the eternal Spirit” secures “eternal redemption” (9:12), “eternal salvation” (5:9), and an “eternal inheritance” (9:15).
토마스 슈라이너(Thomas Schreiner)
Jesus’ death is His sacrifice at the heavenly altar (Heb. 9:12, 24, 25), which opens the way for believers to approach God (Heb. 10:19, 20).
R. C. 스프로울 (R. C. Sproul)
회개에 대한 중요성은 우리가 다 알지 않을까 싶습니다. 특별히 우리 학생회 예배에서는 찬양예배만 끝나면 사죄의 기도를 하고 죄사함 선언을 합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면서 우리의 죄를 깨끗히 씻어야 한다는 신념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중요한 전통인 동시에 오래된 전통입니다.
하지만 살펴보면 생각보다 우리가 회개에 대해서 오해하는 지점이 많습니다. 예컨대 하나님께 회개하지 않는 죄가 있으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예배를 받지 않으신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하나님께 잘못한 일이 있으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지 아니하신다고 생각합니다. 이 모든 생각들이 완전히 틀린 생각은 아닙니다만, 다소 문제가 있는 생각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가진 이런 생각 기저에는 ‘하나님’에 대한 오해가 자리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잘못한 것이 있다면 응당한 벌을 (무조건적으로) 내리는 분, 잘못한 것을 감춘 이의 잘못은 기어코 벌주시는 엄격한 분이라는 오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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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오늘 성경본문은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본문을 조금 살펴보겠습니다. 본문의 배경은 (2절) <성전>입니다. 성전에서 예수님은 <앉으사>, <가르치시>고 계십니다. 이는 기본적으로 반복되는 의미 중의 하나입니다. 요한복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인간의 몸을 입으신 하나님이십니다. 태초부터 말씀이시고, 하나님이신 그 분이 인간으로 이 땅 가운데 오셨습니다. 따라서 ‘성전에서 앉으셔서 가르치시는 예수님’은, (겉으로는) 단순히 성전에서 자기 가르침을 펼치는 랍비 중의 한 사람으로 보이겠지만, (실제로는) 성전에서 좌정하셔서 백성들에게 가르침을 베푸시는 하나님 그 분이십니다. 즉 오늘의 이야기는 2절부터, ‘성전에 좌정하셔서 백성들에게 가르침을 베푸시는 하나님’으로 예수님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문제는 무엇이냐면 성경을 읽는 우리에게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 알려져있지만, 성경 본문 내부에 등장하는 등장인물에게 예수님은 단지 한 명의 평범한 사람에 불과하다는 사실입니다. 더군다나 당대의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눈엣가시라고 생각했습니다. 특별히 우리가 지난 주에 살펴본 요한복음 7장에서는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살해하려하는 음모들이 꾸며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 음모는 여전히 8장에서도 지속됩니다. 그 음모 중의 하나는 (3절)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음행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예수님께 질문하는 장면으로 이어집니다. (4-5절)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사실 이 본문은 무척 이상합니다. 간음은 남자와 여자가 함께 저지르는 죄악입니다. 따라서 여자가 잡혔다면, 응당 남자도 함께 잡혀야만 합니다. 하지만 남자는 없습니다. 더군다나 ‘현장’에서 잡혔는데, 끌려온 이곳은 성전입니다. 그는 어디에서 간음을 저질렀을까요? 지극히 거룩한 성전 안에서 간음을 저지르고 있었을까요?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더군다나 이 때는 명절이었으니까요!) 외부에서 잡혀서 끌려왔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무엇보다도 더 큰 문제는 1세기 당시의 여성인권의 수준이 그리 높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과연 이 여자는 간음을 저지른 범죄자일까요? 혹여나 그는 남성에 의해 겁탈당한 피해자는 아니였을까요?
진실은 말해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여인’이 정녕 죄인인지 모호하다는 겁니다. 그녀는 정녕 ‘모세의 율법에 근거하여 돌로 맞아 죽을 사람’이었을까요? 아마도 그럴 개연성은 극히 드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의도적으로 ‘모세의 율법’을 운운하며 예수님께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묻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모세의 율법’에 근거하여 돌로 치라 명하였다면, 이 명령은 결국 성전 안에서 한 여인을 처단하는 결과를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명절에, 제사가 드려지는 시기에, 성전에서 한 인간을 죽이는 것은 결코 마땅하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이 여인이 돌에 맞아죽을 여인인지도 분명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돌로 쳐 죽이라고 말씀했다면, 아마 이 사실로 말미암아 예수님은 심각한 구설수에 올랐을 것입니다. 명절에 성전 안에서 한 여인을 죽였고, 그 여인이 정녕 죄인인지 모호했던 상태니까 말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돌을 던지지 않고 그녀를 살려둘 것을 명령한다면 ‘모세의 율법’을 어긴 샘이 됩니다. 모세의 율법을 어긴다는 것은 당시의 종교적 권위를 모독한 행위이기에 또한 구설수에 오르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율법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후일에 종교재판을 받을 가능성도 생겨납니다.
쉽게 말해 예수님은 함정에 빠져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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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더 깊게 살펴보기 전에 우리는 한 가지 짚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성전’, 그리고 ‘하나님’ 사이의 상관관계입니다.
한 사람이 죄를 지었다고 가정해봅시다. 그의 죄를 처벌하기 위해서라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디로 끌고 나갔을까요? 간단합니다, 재판정으로 끌고 갔습니다. 두 여인이 한 아이를 두고 싸운 솔로몬의 재판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사법적 판결, 즉 사형과 같은 처벌을 위해서라면 ‘재판장’에 가야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의 죄를 용서하고, 죄로부터 그를 자유하게 하기 위해서라면 그를 어디로 끌고 가야 할까요? 간단합니다. 성전으로 끌고 갑니다. 물론 자신이 범한 죄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치뤄야 합니다만, 자신의 죄를 자백하고, 정당한 대가를 지불했다면, 그는 성전에 나아가 성전에 계신 하나님께 공적으로 용서를 구합니다. 그리고 그가 피해를 입힌 가해자는 하나님께서 보시는 성전 앞에서 그에게 용서를 선언합니다.
쉽게 말하면 ‘재판정’은 벌하는 장소입니다. 반면 ‘성전’은 용서하는 장소입니다.
문제는 오늘 본문이 ‘성전’에서 벌어진 일임에도 불구하고 ‘이 여인을 어떻게 벌해야 할까?’라는 질문이 던져졌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7절)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이 말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닙니다. “이 여인이 죄인이라고 확신하는 자가 있다면, 따라서 모세율법에 따라 그를 처단해야 한다면, 그 사람이 먼저 돌을 던져라. 나는 이 여인이 정녕 죄인인지 정확히는 모르겠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기본적으로 그 여인을 끌고 온 바리새인과 서기관에게 던지는 말입니다. 그녀가 정말 죄가 있는지 정확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판단을 오히려 돌려준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이 의미는 “이 여인이 죄인이라고 한들 명절날 성전에서 그녀에게 돌을 던져 그녀가 성전 안에서 죽게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 사람이 먼저 돌을 던져라. 나는 성전에서 이 여인을 처단해야만 한다는 자신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만약 그 여인이 죄인이라고 한들, 명절날, 제사를 집례해야 되는 날, 성전 안에서 그 여인에게 돌을 던져 죽여야만 할까요? 참고로 고대사회에서 죽은 시체는 ‘부정’을 의미했습니다. 부정한 시체가 성전 안에 있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살아있는 사람을 (성전 안에서) 부정한 시체로 만든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지혜로운 질문을 통해 판단을 다른 사람이 먼저 할 수 있도록 넘겨버립니다. 그 결과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9절)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게 됩니다. 처음에는 이 여인이 간음하다가 잡혔다는 말을 듣고 사람들 대다수가 분노했을 것입니다. 그녀를 처단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지혜로운 질문에, 오히려 그녀를 끌고온 바리새인과 서기관이 주저하자, 사람들은 점점 자신의 분노가 성급했음을 깨닫게 됩니다. “정녕 이 여인은 죽어 마땅한 죄인인가? 그렇다 하더라도 명절날 성전에서 그녀에게 돌을 던지는 것은 마땅한 일인가?”
따라서 모든 사람이 떠나간 이후 (9절) “오직 예수와 가운데 서 있는 여자”만 남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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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우리는 여기서 성전이 성전다운 모습, 성전에 찾아오신 하나님이 하나님다운 모습을 목격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정말 죄를 지었는지 추궁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되었는지 사연을 따져 묻지도 않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이미 다 알고 계시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요.) 단지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죄를 추궁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죄를 따져묻지 않겠다는 겁니다. 그녀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주겠다는 겁니다.
성전이 성전으로 해야 하는 일은 이처럼 ‘죄 용서’를 통해 다시 한 번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갈 기회를 주는 일이었습니다. 성전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뜻은 진정 죄가 있는지 따져 묻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죄책의 명확한 사리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를 통해 다시 한 번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살아갈 기회를 주는 것이야말로 바로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우리는 마지막 장면에서 성전 가운데,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용서를 베푸는 장면을 목격합니다.
우리는 왜 회개를 하는 걸까요? 회개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회개는 하나님이 무섭고 두려워서 미리 죄를 고하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는 감추고 숨기면 벌을 받을까봐 미리 죄에 대한 용서를 비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는 우리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바리새인과 서기관에 의해 예수님께 끌려오면서 온갖 모든 생각들을 했을 것입니다. 돌에 맞아 죽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혹이라도 용서를 빌 기회가 온다면 어떻게 용서를 빌어야 할까 고민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간단합니다.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이는 따져보면 무수한 반성과 후회, 실수가 있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매 순간 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굳이 너의 죄를 추궁하지 않을게, 앞으로 한 번 제대로 살아보자. 잘할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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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우리의 깨어지고 망가진 삶 가운데 찾아오시는 분이십니다. 반성할 것이 많고, 실수한 것이 많으며, 후회하고 있는 우리의 인생 가운데 찾아오시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그 분은 벌하기 위해, 혼내기 위해, 잘못을 따져 묻기 위해 찾아오지 않으십니다. 우리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시기 위해, 사랑으로, 용서로 찾아와서 말씀하십니다.
“앞으로는 잘할 수 있겠지?”
진정한 회개란, 이런 하나님의 말씀 앞에 대한 반응입니다. ‘네, 앞으로 더 잘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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