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은 살아볼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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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은 살아볼만 하다
[서론]
여러분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허무함을 느낄 때가 언제입니까?
내가 열심히 노력했는데 결과가 좋지 않을때, 목표가 사라져 삶의 의미를 잃어버릴 때, 내가 중요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 때 주로 우리는 삶의 허무함을 느낍니다.
단적으로 평생 열심히 살아온 거 같은데 내 집 한채도 살 수 없다면 얼마나 살아온 삶이 허무합니까?
저도 대학교때 열심히 하나님을 섬겼는데 취업이 잘 안되니까 신앙생활에 허무함을 느꼈던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자신들이 목숨을 걸고 따르던 분이 십자가에서 힘없이 죽자 허무한 마음에 물고기잡던 고향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특히 허무함을 많이 느끼는 것 같습니다.
옛날에 비하면 세상은 너무나 발전하고 좋아졌습니다.
우리가 누리는 것도 너무 많아졌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은 점점 쇠약해지고 텅텅 비어만 가는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울증에 시달리고, 자살하는 청년들도 점점 늘어만 갑니다.
10대-30대 사망원인 1위는 수년째 자살입니다.
하루에 37명의 귀한 목숨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인생에 있어 부조리를 느낄 때 가장 허무한 마음을 느끼게 됩니다.
부조리란 불합리하거나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을 말하는데 삶이 때로는 우리를 속이는 것처럼 부조리하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분명히, 잠언에서는 선하고 지혜롭게 살면 성공하고, 심은대로 거두는 게 하나님이 만드신 삶의 법칙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인생이 그렇게 흘러가지 않을 때가 많다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이런 점에서 전도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부조리해 보이는 인생 앞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깨닫게 해줍니다.
[본론]
첫째, 인생은 허무합니다(2절)
1절에서 전도서의 저자는 자신을 다윗의 아들로서 예루살렘 왕, 전도자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의 왕, 바로 솔로몬이 전도서의 저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전도서는 솔로몬 노년기에 쓰여졌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또한 자신을 전도자, 히브리어로 ‘코헬렛’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원래 문자적 의미로는 지혜교사나 설교자를 말합니다.
솔로몬 왕이 지혜를 전파하는 설교자, 교사로서 누군가를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잠언은 어린 아들에게 지혜를 가르쳤다면, 전도서는 청년에게 지혜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솔로몬이 인생의 단맛, 쓴맛 다 경험해보고 청년들에게 자신의 인생노하우를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설교자 솔로몬은 첫마디부터 청년들의 마음을 뒤숭숭하게 만듭니다.
2절입니다.
헛되고, 헛되다. 헛되고 헛되다. 모든 것이 헛되다.
인생이 헛되다는 말을 다섯번이나 연속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최상급 표현입니다.
인생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를 강조하여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열심히 인생을 살아가야할 청년들에게 이런 말은 기운을 쭉 빼놓는 것만 같습니다.
여기서 ‘헛되다’라는 히브리어 ‘헤벨’은 원래 다른 성경에서는 ‘입김이나 안개’라는 말로 쓰였습니다.
인생이 마치 연기처럼 잠깐 존재했다 사라지고, 잡을래야 잡을수도 없는 그런 허무한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3절은 ‘헛되다’는 의미를 좀 더 설명해줍니다.
사람이 세상에서 아무리 수고한들, 무슨 보람이 있는가?
여기서 보람이란, 무엇인가 얻는 것을 말합니다.
아무리 열심히 살아봤자 별로 남는게 없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살아봤자 별로 의미가 없다는 말입니다.
너무나 인생은 짧고, 내 계획대로, 내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을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잠언에서는 인과응보, 심은데로 거둔다라고 했는데, 왜 솔로몬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까?
두가지 이유때문입니다.
첫째, 모든 것이 지루하기 때문입니다.
4절에서 세대가 아무리 바뀌어도 세상은 바뀌지 않고 그대로입니다.
한 세대의 사람들이 죽고 새로운 세대의 사람들이 태어나도 세상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역사는 진보했을지 모르지만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람이 사는 모습은 거의 비슷합니다.
삶의 욕구가 결국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먹고, 자고, 싸고, 일하고, 결혼하고, 죽고 모두 동일합니다.
좀 잘 살면 자주 스테이크 먹고, 좀 못살면 자주 된장찌게 먹습니다.
좀 잘 살면 브랜드 옷입고, 좀 못살면 보세옷입습니다.
재벌이나 가난한 사람이나 좀 더 좋은 음식, 좀 더 좋은 옷입고 싶은 욕구는 똑같습니다.
뭐 특별할 게 없습니다.
그래서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 만나보면 고민거리도 거의 비슷합니다.
그런데 4-7절에서 말하는 자연을 봐도 마찬가지입니다.
해도 떴다가 져서,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고, 바람도 돌고돌다가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강물도 흘러 바다로 가지만 결국 다시 돌아갑니다.
모든 것이 반복되는 만물이 다 지쳐있는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세상이 새롭지 않고, 지루하다는 것입니다.
새것이라고 해도 이미 오래전에 있던 것이 좀 바뀐 것 뿐입니다.
이것도 시간이 좀 지나면 지루해져 버립니다.
그래서 아무리 새로운 것들 일지라도 이런 우리의 지루함을 깨뜨리지 못합니다.
눈으로 보아도, 귀로 들어도 결코 만족하지 못합니다.
이처럼 삶이 근본적으로 지루하기 때문에 아무리 수고해봤자 헛되다는 것입니다.
둘째, 모든 것은 결국 기억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11절입니다.
지나간 세대는 잊혀지고, 앞으로 올 세대도 그 다음 세대가 기억해주지 않을 것이다.
인간은 과거를 금세 잊어버리기 때문에 역사는 반복됩니다.
인간의 욕망도 반복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새로운 것이라고 해봤자 원래 과거에 있던 것일 뿐입니다.
예를들어, 유행도 돌고 돌잖아요.
제 어린 시절에는 구멍나거나 찢어진 청바지는 꽤매서 입었는데 요즘은 억지로 구멍을 내거나 찢어서 입습니다.
과거 가난한 집 아이들 패션인데 지금은 구제패션이라면서 누구나 할 것없이 따라하죠.
그래서 내 것을 새것이라고 주장하면 벌써 과거를 잊었다는 증거가 될 뿐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금새 잊어버리지만 또한 누구나 기억되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 삶에 의미를 준다고 믿기 때문이죠.
전도서 3장 11절에 보면 하나님이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유명해지려 하고 세상에 자신의 업적을 남기려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문제는 자신이 죽고나면 그것이 오래 기억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중에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을 얼마나 기억하고 계시나요?
한 시대의 획을 그으신 분들이셨지만 이제는 점점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지워져 갑니다.
하물며 우리들 이겠습니까?
과연 우리들이 죽고난 후 50년, 100년후에도 누군가에게 기억될까요?
저 또한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가 돌아가신지 25년 넘었는데 거의 기억에서 가물가물합니다.
우리가 열심히 살아봤자 결국 기억해주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우리는 금방 잊혀집니다.
어떻습니까?
우리 인생이 허무하지 않습니까?
수고해봤자 모든 것이 지루할 뿐이고, 사람들이 결국 기억하지도 못할 테니 아무 의미도 없는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삶으로부터 도피하여 어떤 수고나 고생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차피 헛된 몸부림일테니까요.
그냥 스포츠 경기에 탐닉하고, 오락게임이나 하면서 나의 욕망에만 집중하면 됩니다.
허무주의를 주장하며 ‘신은 죽었다’라고 말한 니체가 바로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럼 허무주의를 전파하는 전도서는 신앙인들이 읽어서는 안되는 책이여야만 합니다.
그러나 전도서 역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전도서는 인생이 허무하기 때문에 오히려 인생을 허무하게 살아서는 안된다는 모순된 진리를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면, 우리 삶은 지루한 반복처럼 보이지만 지루하지 않으며,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지만 기억되어 진다는 말을 역설적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인생은 허무하지만 허무하지 않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둘째, 인생은 허무하지 않습니다(3절)
3절에서 ‘세상에서’라는 말은 다른 성경번역본에서는 ‘해 아래서’, ‘하늘아래서’라는 말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지금 솔로몬은 하늘 아래에서 일어나는 일들, 즉 하나님을 모르는 인생에 대해서만 기록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하늘 위를 바라보면 우리의 관점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하늘 위에 계신 하나님이 빠진 세상은 허무할 뿐이지만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 개입하신다면 말이 달라집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기에 우리의 인생은 지루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기에 우리의 인생은 기억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기에 우리의 수고는 헛되지 않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이 제게 이런 간증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 분은 정말 허무주의에 빠져있던 사람이었습니다.
날마다 회사가고, 술마시고, 친구만나고, 또 회사가고…삶이 너무 다람쥐 쳇바퀴돌듯 지루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만나자 모든 게 바뀌었습니다.
회사를 가는 중에 매번 짜증만 나고 웃어본 적이 없는데 그 날은 웃음이 절로 나오더란 겁니다.
왜냐하면 단한번도 들어본적이 없던 새 소리가 자신의 귀에 들렸기 때문입니다.
단한번도 주목하지 않았던 꽃이 자신의 눈에 보였기 때문입니다.
새가 자기한테 노래를 들려주고, 꽃이 인사를 하더랍니다.
가만히 생각해보십시오.
세상이 바뀐게 있습니까?
없던 새가 날라온 것이고, 없던 꽃이 피어난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 분의 인생에 개입하시자 지루했던 세상이 새로워진 것입니다.
그래서 고후5:17 은 우리에게 이렇게 증거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우리가 새것이 되었기에 세상이 새롭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뿐입니까?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우리의 모든 수고가 헛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는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분들이 바로 선교사님들입니다.
아프리카에서 평생을 섬기다가 말라리아에 걸려 그 땅에 묻힌 여자 선교사님이 있습니다.
또 원주민들 성경번역을 위해 일생을 바친 선교사님도 있습니다.
어느 누가 기억해줍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그들의 모든 수고를 기억해주십니다.
그러나 그분들의 수고만 특별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작은 수고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우리의 수고를 기억하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은 기억하십니다.
마태복음10:42절 이 그 증거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작은 자, 즉 어렵고 소외된 자에게 물 한잔 준 것조차 기억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제 인생이 성공했다고 정의할 수 있는 말 한마디가 있습니다.
제가 주님앞에 섰을 때 이 말 한마디만 듣는다면 충분합니다.
‘수고 많았다, 나은상 형제여, 이제 내 안에서 푹 쉬렴’
우리 모두 이 말 한마디면 충분하지 않을까요?
그러므로 우리가 이 땅에서 하는 모든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수고를 자랑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왜일까요?
셋째, 오늘 하루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잘아시는 말들이지만 현재라는 말이 영어로 present입니다.
그런데 선물이라는 영어도 present입니다.
현재 내가 살아가는 오늘 하루, 지금 이순간이 바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의 선물답게 귀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갈 때 우리의 수고는 가치있습니다.
신약성경이 기록된 헬라어에는 시간을 뜻하는 단어가 두가지 있습니다.
바로 크로노스와 카이로스입니다.
크로노스가 물리적 시간이라면 카이로스는 특별한 의미가 부여된 시간입니다.
똑같은 24시간이라도 어떤 사람은 하루라는 시간을 허무하게 흘려보내며 크로노스로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하루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며 카이로스로 살아갈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그 차이를 만드는 것이 바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시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분과 동행한다면 우리의 모든 시간은 카이로스의 시간이 될 것입니다.
에베소서 5장 15-1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없는 자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있는 자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여기서 ‘세월’이라는 단어는 크로노스가 아니라 카이로스입니다.
‘아끼라’는 말은 시간을 사서 기회를 잡으라는 말입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에게 모든 시간은 하나님의 뜻을 행할 기회입니다.
그 사람은 카이로스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탈리아 토리노 박물관에 가면 카이로스 석상이 있습니다.
어떻게 생겼냐면 벌거벗었고, 앞머리는 풍성한데 뒷머리는 대머리입니다.
또한 손에는 칼과 저울을 들고 있고, 어깨와 뒷발꿈치에는 날개가 달려 있습니다.
거기 보면 이렇게 쓰여있습니다.
‘먼저 내가 벌거벗은 이유는 쉽게 눈에 띄기 위함이고, 내 앞머리가 무성한 이유는 사람들이 나를 쉽게 붙잡기 위함이며, 내 뒷머리가 대머리인 이유는 한 번 지나가면 쉽게 붙잡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요, 손에 들고 있는 칼과 저울은 나를 만났을 때 저울처럼 정확히 판단하고, 칼처럼 신속하게 의사 결정을 하라는 뜻입니다. 어깨와 발뒤꿈치에 날개가 달린 이유는 최대한 빨리 사라지기 위함입니다.’
반복되는 일상의 시간들이 우리에게는 크로노스의 시간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선물로 여기고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만들고 있습니까?
[결론]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노인이 된 솔로몬은 인생에서 누릴 거 다 누려보고 결국 인생이 허무한 것이라고 결론내렸습니다.
그래서 청년들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허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함께한 인생은 결코 허무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삶에 개입하셔서 새 일을 창조하시기 때문입니다.
반복되는 우리의 하루 하루가 하나님의 선물이며 날마다 새로운 날이기 때문입니다.
어제와 오늘은 다른 하루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상의 모든 수고를 기억하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루 하루가 카이로스의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요한일서 2장 17절은 우리에게 이렇게 증거합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지난주에 이어 이번주도 정호승 시인의 시를 하나 소개하고자 합니다.
<낙과>
내가 땅에 떨어진다는 것은
책임을 진다는 것이다.
햇빛에 대하여
바람에 대하여
또는 인간의 눈빛에 대하여
내가 지상에 떨어진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이다
내가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그 동안의 모든 기다림에 대하여
견딜 수 없었던
폭퐁우의 폭력에 대하여
내가 책임을 다한다는 것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책임을 지는 것이므로
내가 하늘에서 땅으로 툭 떨어짐으로써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가장 최근에 쓴 ‘슬픔이 택배로 왔다’는 시집에 나온 ‘낙과’라는 시입니다.
무르익어 땅에 떨어진 과일을 보며 지은 시입니다.
저는 이 시를 보며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는 하늘에 있다가 땅에 떨어진 낙과와 같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과 삶 그리고 세상에 책임져야만 합니다.
그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우리의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낙과와 같은 우리 모든 성도들이 되시길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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