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참함을 비추시는 그리스도

사무엘하 강해시리즈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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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주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님 여러분 오늘 본문은 어제에 이어서 요압과 아브넬의 전쟁을 다룬 본문입니다 어제 본문에서 통제할 수 없는 상황 가운데 그리스도가 소망되신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오늘은 통제할 수 없는 상황 가운데 사람이 절대 해결할 수 없는 비참함에 빠질 때 성도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1- 사람이 노력해도 죄의 비참함을 되돌릴 수 없다.
(설명)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첫 번째 교훈은 사람이 노력해도 죄의 비참함을 되돌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스루야의 형제 중 아사헬이 죽게 되고 요압과 아비새는 아사헬을 죽인 아브넬의뒤를 쫓아 갔습니다. 이 전쟁에서 잃은 것이 많습니다. 어제 본문에서 보신 것처럼 열 두 명의 대리전에 나간 젊은 이들을 잃었습니다. 거기다가 다윗의 최측근 중에 한 명이자 훌륭한 용사였던 아사헬을 잃었습니다. 발이 들노루처럼 빨랐다는 평을 들었던 아사헬은 평소에 이름 난 용사였을 것입니다. 이 전투의 책임자인 요압은 이미 손해를 많이 보았고 아브넬의 군사들을 어떻게든 섬멸해야 그나마 이 손해에 대한 보상이 될 것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해가 지도록 추적을 했습니다. 한 편 아브넬은 자신을 따른 군사를 모아 작은 산 꼭대기에 섰습니다. 이 때 아브넬이 요압에게 화의를 요청합니다. 26절에 “아브넬이 요압에게 외쳐 이르되 칼이 영원히 사람을 상하겠느냐 마침내 참혹한 일이 생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네가 언제 무리에게 그의 형제 쫓기를 그치라 명령하겠느냐”라고 말씀합니다. 칼이 영원히 사람을 상하겠느냐는 원어상으로 칼이 영원히 사람을 먹겠느냐인데 일종의 히브리어 숙어입니다. 칼로 사람을 죽이는 행위를 칼이 사람을 먹는다고 그렇게 표현합니다. 칼이 사람을 영원히 먹을 수 없습니다. 칼이 사람을 무한정으로 먹는다면 나중에 그 칼을 들 사람도 칼에 먹힙니다. 칼의 결론은 늘 생명을 앗아가는 것입니다. 사람이 멈추지 않는 이상 칼은 사람을 먹기를 멈추지 않습니다. 칼을 든 사람이 칼을 제지해야 합니다. 이것이 전쟁의 참혹함입니다. 아브넬은 요압에게 계속 싸워봐야 결론이 안난다는 걸 말합니다. 그래서 이제 그만 추격하고 그만 싸울 것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브넬이 요압에게 네가 언제 무리에게 그의 형제 쫓기를 그치라 명령하겠느냐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러니까 너희나 우리나 다 이스라엘이 원래 한 혈통, 한 족속이라는 것에 호소하고 있습니다. 동족상잔의 비극을 멈추자고 이야기 합니다. 먼저 열 두 명씩의 청년들을 불러 대리전을 펼치자고 하고 또 요압의 친동생인 아사헬을 죽인 아브넬이 하기엔 뻔뻔스러운 이야기입니다. 아브넬은 이제야 더 이상 살육이 일어나면 안되겠다고 판단하고 화의를 요청하지만 이미 많이 늦었습니다. 이미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고 아브넬이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것은 요압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제 말씀드린 것처럼 요압의 싸움은 믿음의 싸움도 아니고 불신자의 이전투구와 똑같은 싸움을 했습니다. 젊은이들을 잃고 친형제를 잃었습니다. 사람이 자기 노력과 지혜로 모든 상황을 다 통제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요압의 입장에서는 추격해서 동생의 복수를 하면 될 것 같지만 이미 모든 상황은 통제에서 벗어나 가장 비참한 결과로 가고 있었습니다. 결국 아브넬도 요압도 모두 얻는 것 없이 이 참혹한 상황을 마무리해야 합니다. 아브넬이 화의를 요청했고 요압도 이것을 받아들였지만 이미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올 순 없습니다. 비참함이 모든 사람을 휩쓸고 난 뒤에 일입니다. 27절에 요압의 말에 안타까움이 녹아 있습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네가 말하지 아니하였더면 무리가 아침에 각각 다 돌아갔을 것이요 그의 형제를 쫓지 아니하였으리라 하고”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여기 네가 말하지 아니하였더면은 14절을 말합니다. 처음 기브온에서 대치했을 때 청년들을 내세워서 대리전을 펼쳐보자 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요압의 말은 만일 아브넬이 요압에게 청년들을 내보내서 대리전을 펼치자고 하지 않았으면 이 지경이 되도록 죽고 죽이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이것은 그저 가정일 뿐입니다. 요압은 그 때 아브넬과 똑같이 그 대리전을 하는 것에 찬성했고 믿음의 전쟁 대신 세상적이고 인간적인 전투를 선택해서 이런 결과가 주어졌습니다. 이렇게 후회하고 남탓 해봤자 달라지는 것은 없고 자기 동생의 복수를 위해 쫓아가봤자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본 것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사람의 불신앙으로 인해 비참함과 참혹함이 생겼지만 사람이 이것을 해결할 수 없고 할 수 있는 것이라곤 후회하는 것, 남탓 하는 것 밖에 없다는 것이 슬픕니다.
(적용) 우리가 불신앙의 길을 선택하고 죄의 유혹에 빠져 살 때 거기에서 나오는 비참함은 우리가 결코 쉽게 감당하고 해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자기 동생이 죽을 줄 알았으면, 이 전쟁에서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을 줄을 알았으면 요압은 절대 그 대리전에 동의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본문은 이것을 통해 우리에게 불신앙의 길을 선택하지 말라고 교훈합니다. 거기에서 나오는 결과는 우리가 책임지기에 너무 무겁고 어려우니 세상적인 방식으로 살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우리가 해결하기에 너무나 힘든 것입니다.
2- 비참함 가운데 참된 빛이 되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설명)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두 번째 교훈은 비참함 가운데 참된 빛이 되는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28절에 요압이 아브넬의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요압이 나팔을 불었는데 온 무리가 머물러 서고 다시는 이스라엘을 쫓아가지 아니하고 다시는 싸우지도 아니하였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본문을 볼 때 요압이 아브넬의 한 마디에 너무 쉽게 이 추격전을 포기하고 돌아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지만 요압이 아브넬이 진 친 곳에 도착했을 때가 이미 어두웠고 이미 많은 사람과 자기 동생을 잃었기 때문에 요압으로서는 계속해서 전쟁을 수행하는 것이 심적으로도 명분상으로도 부담이 컸을 것입니다. 그래도 아브넬이 먼저 그만하자고 이야기 했으니 아주 패배한 것은 아니고 이정도 했으면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가 수습하기에 상황이 너무 악화되었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요압이 나팔을 불어서 퇴각을 명령할 때 아브넬도 부하들을 데리고 다시 자기가 있던 땅인 마하나임으로 돌아갑니다. 30절에 요압이 아브넬 쫓기를 그치고 돌아와 무리를 다 모았습니다. 다윗의 신복중에 열 아홉명이 전사했고 아사헬이 전사했습니다. 하지만 31절에 보시면 아브넬에게 속한 자들을 쳐서 삼백육십명을 죽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부분을 보면 생각하기를 요압의 군사는 20명만 죽고 아브넬의 군사는 삼백육심명 죽었으니까 요압이 잘했네 하고 생각할 수 있지만 본문은 그것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적군 삼백육십명을 죽인 전과를 냈지만 퇴각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바로 요압의 동생 아사헬의 죽음입니다. 30절 본문에서도 그냥 20명이 죽었다고 하면 되는데 굳이 아사헬이 죽은 것을 언급하고 19명이 죽었다고 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아사헬이 죽은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숫자만 보고 판단하면 요압이 잘한 것 같지만 본문의 의도는 이렇게 결과를 냈지만 아사헬이 죽었기 때문에 이 전쟁은 참 비참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은 이 사건을 하나의 소망으로 마무리합니다.
32절에 보시면 아사헬의 장례가 나옵니다. “무리가 아사헬을 들어올려 베들레헴에 있는 그의 조상 묘에 장사하고”라고 말씀합니다. 여기 베들레헴을 언급한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요압은 믿음의 전투를 보여주지 못했고 자신이 통제할 수 없었던 비참함만을 경험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요압의 마지막 여정을 베들레헴으로 마무리합니다. 요압은 믿음을 벗어난 인생의 참혹함을 경험했고 이 문제는 요압 뿐 아니라 인류 전체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자기 욕망대로 사는 이들은 다 요압이 경험한 비참함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아사헬이 장례를 치른 베들레헴에서 장차 세상의 비참함을 해결할 분이 오십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사무엘상의 저자는 메시아의 복음을 강조하기 위해 이 비참한 전쟁터의 희생자인 아사헬의 장례식이 베들레헴에서 일어났다는 것을 기록하며 강조합니다. 요압이 겪은 이 참혹함의 정답은 오로지 복음이었습니다. 아브넬에게 복수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도 결과가 더 좋으니까 우리가 저들보다 병력 손실이 더 적고 열여덜배나 더 많이 죽였다고 자랑하는 것이 이 참혹함을 해결할 정답이 아닙니다. 그 정답은 베들레헴에 있습니다. 그 정답은 바로 복음입니다. 32절에 보시면 이 베들레헴에서 아사헬의 장례를 치르고 나서 다시 헤브론으로 돌아갈 때 해가 밝았습니다. 사무엘상하는 이런 빛의 밝음과 어두움을 통해 영적인 상태를 은유하기도 하는데 요압이 아브넬을 추격해서 전쟁의 참혹함이 극도로 드러났을 때는 해가 졌음을 표현합니다. 이게 24절에 나옵니다. 이제 베들레헴에서의 장례식이 끝나고 복음이 암시된 이후에 헤브론으로 돌아갈 땐 해가 밝았다는 것을 묘사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참혹한 세상의 빛이 되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적용) 우리 인생의 비참함의 정답이 무엇입니까? 요압이 한 것처럼 열심히 복수를 하면 되겠습니까? 내가 지난 번에 이걸 못했으니까 내가 이번엔 반드시 이걸 성공시켜야 되겠다. 다시 성공하면 실패의 상처와 비참함은 다 사라질거야 하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물론 지난 시절의 상처와 아픔을 복기하며 다시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것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우리 힘으로만 이렇게 살려고 할 때 문제가 생깁니다. 우리 힘으로 과거의 구멍을 땜질하려 해봤자 절대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상실과 비참함의 구멍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을 수준으로 계속 커지기 마련입니다. 마치 요압이 그의 동생을 상실하고 복수하려고 추격전을 벌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럼 우리 인생의 비참함의 정답은 좋은 결과를 내는 것입니까? 다른 사람보다 열 여덟 배 더 나은 성과만 거두면 우리 인생의 비참함이 없어집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너무 상황이 안좋으니까 요압이 회군을 결정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인생의 비참함을 해결하기 위해선 우리는 다시 베들레헴을 바라봐야 합니다. 우리 인생의 비참함의 정답은 과거의 구멍을 메우고 결과를 드러내는 것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베들레헴을 바라볼 때 해결 됩니다. 우리의 모든 비참함과 죄를 홀로지시고 십자가에서 해결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할 때 우리 인생의 비참함이 해결되는 것입니다. 정답은 다른 그 어떤 것이 아니라 바로 복음입니다.
결론
설교를 맺겠습니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님 여러분 우리의 삶은 우리의 불신앙과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비참함에 처하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기억하며 올바른 믿음의 선택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비참한 삶을 선택해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회복의 빛이 되신 분이 계십니다. 바로 베들레헴에서 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가 치열한 추격전을 펼칠 때, 적군과 싸워서 돌아올 때 어둡던 우리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다시 빛으로 채워지며 회복이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여러분 오늘 하루도 비참한 우리 삶에 빛으로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소망 삼는 하루 보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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