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제되지 않을 때 그리스도를 더 붙들라

사무엘하 강해시리즈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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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주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님 여러분 오늘은 요압이 세상적인 방식으로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어떤 일을 당했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어떤 은혜를 베풀었는지 본문을 통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본문을 통해 이 교훈을 살펴보고 실천할 때에 우리 삶 가운데 하나님의 큰 은혜가 임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1- 세상적인 방식으로는 우리의 일이 통제되지 않는다.
(설명)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첫 번째 교훈은 세상적인 방식으로는 우리의 일이 통제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아브넬과 그 수하들이 스루야의 아들 요압과 다윗의 부하들을 만나서 군사적인 충돌을 하는 이야기에 대해 다룹니다. 12절과 13절에 이 두 무리들이 기브온에서 대치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나중에 본문을 전반적으로 보시면 알겠지만 요압이 다윗을 대신해서, 다윗의 권한을 어느정도 위임 받아 여기에 왔을텐데 그가 전쟁을 하는 방식은 다윗과 같지 않았습니다. 2장 1절에 다윗은 헤브론으로 올라가는 일을 두고 하나님께 두 번이나 기도하며 올라갔지만 요압의 태도는 신앙과 그렇게 상관이 있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요압은 그저 불신자들이 하는 것처럼 군사적인 목적에서만 기브온으로 와서 대응하는 수준으로 보입니다. 요압이 하는 전투는 믿음의 전투가 아닙니다. 딱 세상적인 방식으로 전쟁을 합니다. 어떻게 세상적으로 전투를 합니까? 14절에 보면 아브넬이 요압에게 제의합니다. “청년들에게 일어나서 우리 앞에서 겨루게 하자!” 그리고 각 진영에서 열 두 명의 청년들이 나와서 대결을 합니다. 사울이 골리앗과 싸우게 한 것과 비슷한 일종의 대리전입니다. 16절에 보면 이해가 안되는 장면이 있습니다. 너무 무식하게 대결을 한다는 생각이 드는데, 16절에 보시면 “각기 상대방의 머리를 잡고 칼로 상대방의 옆구리를 찌르매 일제히 쓰러진지라” 라고 말합니다. 양쪽에 있는 젊은이들이 이 무식한 방식의 전투에 모두 희생을 당했습니다. 다윗이 여태껏 전쟁을 치른 방식을 보면 다윗이 먼저 나서서 믿음으로 전쟁을 했고 칼을 뽑았지 다른 이들을 결투의 제물로 내세워서 희생시키지 않았습니다. 이건 사울의 방식입니다. 사울은 골리앗의 도발에 다른 이를 내세웠고 전쟁에 있어서 늘 소극적으로 소모전을 벌였습니다. 스타일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문제입니다. 다른 이들을 내세워서 전쟁을 하거나 다른 이들이 나서도록 전쟁을 방치하는 방식은 믿음의 방식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나라와 영광을 위해 이기게 하실 줄로 믿고 나아가는 것이 믿음의 방식입니다. 요압은 이런 믿음의 방식과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불법적인 왕조를 세운 아브넬과 똑같은 불신앙의 사람입니다. 아브넬과 똑같은 사람이기 때문에 그가 제안한 것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불신앙적인 두 사람 때문에 괜히 스물 네명의 생떼같은 젊은이들의 목숨만 희생되었습니다. 머리를 잡고 옆구리를 칼로 찌르는 방식의 이 대결과 같은 것이 고고학적으로도 발견되었습니다. 텔 할라프라는 곳에서 그림이 하나 발견되었는데 두 명의 남자가 서로의 머리를 부여잡고 상대방의 옆구리를 둔기로 공격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이런 방식의 대리전에서는 반드시 희생자가 나옵니다. 싸움을 아무리 잘해도 무조건 공격을 허용하는 방식의 전투이기 때문입니다. 한 번 이상은 옆구리에 공격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이 전투에 나가면 죽게 될 확률이 아주 높습니다. 이런 전투에 응한 것은 전혀 믿음의 방식이 아닙니다. 아브넬은 세상적인 방식을 제안했고 요압은 이를 수용했습니다 요압은 믿음의 전투가 아닌 세상의 도발에 걸려 세상적인 싸움을 한 것입니다. 요압은 자신이 다윗의 편에 서 있는 이상 자신이 하는 방식과 일은 모두 정당성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잘 풀릴 것이라 생각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가 믿음의 방식을 저버리는 순간 그가 하는 모든 사역은 그의 통제에서 벗어나 알 수 없는 결과를 맞이하게 됩니다.
18절부터 보시면 아사헬이라는 사람이 아브넬과 추격전을 벌이는 장면이 나옵니다. 24명의 젊은이가 모두 죽은 대리전이 끝나고 본격적으로 양 편 사이에서 전투가 벌어집니다. 요압의 동생인 아사헬이 왠지는 모르지만 아브넬만 집요하게 추적합니다. 아사헬은 추격전에 능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본문에서 아사헬의 발을 들노루같이 빠르다고 한 것을 보면 적을 추적해서 포획이나 암살을 하는데 특화된 사람으로 보입니다. 평소 같으면 아사헬이 한 번 추격하면 놓치지 않고 잡았거나 죽였을텐데 오늘 본문에서는 평소의 아사헬이 하던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아브넬이 그를 집요하게 쫓아오고 있는 아사헬의 배를 창 뒤 끝으로 찔렀는데 그 자리에서 엎드러져 죽게 되었습니다. 추격전에 능한 그가 정말 어이없이 죽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이 죽음은 요압의 판단을 흐려서 요압이 아브넬을 죽이게 하고 이후에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브나야를 통해 요압을 죽이게 되는 얽히고 얽힌 사건의 시작이 됩니다.
어쨌든 다시 아사헬의 이야기로 돌아오면 아사헬이 하는 것을 보아도 믿음의 전쟁을 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19절에 보면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아브넬의 뒤를 쫓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공적인 사역으로 전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이나 성격으로 이 일을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요압과 아사헬이 하는 것을 보면 세상적인 방식대로 자신의 감정과 순간의 올라오는 기분대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니까 통제되는 것이 없고 풀리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맡으면 믿음의 방식대로 하나님의 방식대로 해야 합니다. 다윗이 했던 것처럼 기도로 물어보는 과정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을 가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그런 과정이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편에서, 교회에 소속되어 사역을 시작했지만 상황은 통제되지 못하는 쪽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2- 통제되지 않는 상황에서 그리스도만을 믿고 따라야 한다.
(설명) 이런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는 요압과 다윗의 수하들에게 승리를 허락하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결국 이 전쟁의 전체적인 판도는 메시아의 계보를 이을 다윗에게 기울도록 하나님께서 섭리하시기 때문입니다.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두 번째 교훈은 통제되지 않는 상황에 있을지라도 그리스도만을 믿고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17절에 보시면 이 기브온에서의 군사적인 충돌의 결과가 무엇인지 요약을 해줍니다. “그 날에 싸움이 심히 맹렬하더니 아브넬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윗의 신복들 앞에서 패하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싸움은 맹렬했습니다. 세상적인 방식으로 싸우는 불신자와 세상적인 방식으로 싸우는 언약백성이 싸웠는데 언약 백성이 일방적으로 이긴 것이 아니라 무승부에서 조금 기울 정도로 맹렬했습니다. 언약 백성이 하나님의 방식을 져버리고 세상적인 방식으로 싸웠기 때문입니다. 좌우지간 결과를 놓고 보면 이 전쟁은 언약백성의 승리가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 승리를 메시아의 계보가 있는 쪽에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보시면 아브넬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윗의 신복들 앞에서 패하니라라고 이야기합니다. 이스보셋 쪽에 사람들을 이야기 할 때는 아브넬과 이스라엘 사람들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그런데 요압이 데리고 온 사람들을 표현할 때는 다윗의 신복들 앞에서 패하니라라고 이야기 합니다.
아브넬이 데리고 온 사람들은 무너진 나라, 사람의 지혜로 세운 나라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모인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요압이 이끄는 군사들은 어떻게 모인 사람들입니까? 요압이 이끄는 자들은 다윗의 신복들로 표현되었습니다. 다윗 때문에 모인 사람들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정통성을 잇는 대리통치자입니다. 메시아의 계보를 성립할 사람입니다. 아브넬이 데리고 온 이들은 잘못된 정통성, 인간적인 정통성을 믿고 싸우는 사람이지만 요압이 끌고 온 사람들은 믿음의 계보의 편에 써서 싸우는 사람들입니다. 믿음의 계보에 편에 써서 싸우는 이들이 비록 실수도 하고 잘못된 판단을 해서 많은 희생을 치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들을 사용해서 새로운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자 하십니다. 다윗의 계보, 믿음의 계보를 붙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역사 가운데 하나님은 이 믿음의 계보를 붙든 사람들에게 승리를 베푸시고 회복을 베푸셨습니다. 북 이스라엘 왕국과 남쪽 유다왕국이 둘 다 죄인이고 둘 다 멸망했어도 하나님은 다윗의 계보가 있는 남쪽 유다왕국에 회복과 구원의 역사를 일으키셨습니다. 우리는 이 계보를 어떻게 붙들고 있습니까? 우리는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믿음의 계보를 붙들고 있습니다.
우리는 늘 믿음으로 살아야 하지만 그렇게 살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나의 감정과 판단대로 세상 사람들이 하는대로 똑같이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교회의 성도라고 하면서 교회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우리의 욕심이, 자존심이 그대로 투영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절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입니다. 이것을 놓치면 다 끝납니다. 이것을 놓치면 회복의 기회조차도 없습니다. 우리의 잘못된 생각과 행동 때문에 우리가 해야할 일들이 모두 순서와 때를 놓지고 뒤죽박죽 되기도 하지만 결국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붙들고 있을 때 우리가 섬기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다시 회복의 때를 맞이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승리가 보장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힘과 지혜로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것을 고백해야 합니다. 오로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섬기고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가 임하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서 살 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승리 속으로 우리를 인도하여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지혜롭고 능력이 있어도 그리스도가 없으면 그것은 무지함이 되고 무능력이 되지만 우리에게 그리스도만 있으면 우리의 무지를 극복하는 하나님의 지혜가 임합니다. 우리의 무능을 극복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임합니다. 이 놀라운 믿음의 원래 위에 우리의 삶을 견고하게 세워야 할 것입니다.
결론
설교를 맺겠습니다. 우리가 세상적인 방식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고 섬기려 하면 아무것도 통제하지 못하는 혼란 가운데 처하게 됩니다. 우리는 세상적인 방식이 아닌 믿음의 방식으로 하나님의 일을 섬겨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교회의 성도이지만 불신자와 같은 상태에까지 이르게됩니다. 우리가 아무것도 통제할 수 없고 우리의 지혜와 능력으로 아무것도 되지 않을 때 우리는 다시 믿음의 계보를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 분인 누구입니까? 우리가 세워야 하는 나라가 어떤 분의 나라입니까? 우리가 섬겨야 하는 분은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답을 가지고 있을 때 아무것도 통제할 수 없고 파악할 수 없는 상황이 오더라도 우리는 주 안에서 승리하게 됩니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님 여러분 오늘 하루도 아무것도 통제할 수 없는 상황 가운데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함으로써 승리하는 하루 보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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