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Tone Analysis

Overall tone of the sermon

This automated analysis scores the text on the likely presence of emotional, language, and social tones. There are no right or wrong scores; this is just an indication of tones readers or listeners may pick up from the text.
A score of 0.5 or higher indicates the tone is likely present.
Emotion Tone
Anger
0UNLIKELY
Disgu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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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ar
0UNLIKELY
Joy
0UNLIKELY
Sadness
0UNLIKELY
Language Tone
Analytic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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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fid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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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ntative
0UNLIKELY
Social Tone
Open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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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scientious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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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traver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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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reeable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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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otional Range
0UNLIKELY

Tone of specific sentences

Tones
Emotion
Anger
Disgust
Fear
Joy
Sadness
Language
Analytical
Confident
Tentative
Social Tendencies
Openness
Conscientiousness
Extraversion
Agreeableness
Emotional Range
An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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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다니엘서를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바로, 그릇의 이미지입니다.
주전 605년경에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유다를 침공했습니다.
그 때, 많은 유다 사람을 포로로 끌고 가고, 많은 그릇을 바벨론으로 빼앗아갑니다.
이게 무엇을 의미할까요?
성경에선 유다 백성과 그릇으로 비유할 때가 많습니다.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이 쓰시는 그릇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그릇을 느부갓네살 왕이 빼앗아 간거죠.
그렇다면 남유다 백성들은 왜 느부갓네살에게 끌려 갔을까요?
남유다의 그릇들은 왜 느부갓네살에게 탈취 당했을까요?
하나님만 의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자기 인생의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쓰시던 그릇들을 다른 주인에게 넘기신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잠깐 느부갓네살에게 넘기셨던 것이기 때문에, 여전히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소유 된 그릇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느부갓네살은 남유다 백성들을 자신의 그릇처럼 여겼습니다.
어제 살펴본 다니엘서 1장의 배경이 바로 그 장면을 묘사하고 있는 겁니다.
느부갓네살은 다니엘에게 자신이 주는 음식을 먹여서 자기 그릇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다니엘은 느부갓네살 왕이 주는 음식을 먹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은 하나님만 의지하는 거룩한 그릇이 되고 싶었습니다.
..…
.
.
그래서 결과가 어떻게 되었나요?
느부갓네살에게 굴복한 그릇들보다 더 윤택하고 아름다운 그릇이 되었다고 기록되었습니다.
그리고 더 기가 막힌 결론을 하나님께서 독자들에게 던져주십니다.
1장 21절을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고레스는 바벨론을 멸망시킨 페르시아의 왕입니다.
다니엘은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에게 굴복하지 않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거룩한 그릇으로 쓰임 받으니, 나라가 바뀌어도 자리를 지킨 겁니다.
현상만 봤을 때는 열국의 왕들이 다니엘을 계속 등용한 것 같지만,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께서 다니엘을 계속 쓰신 겁니다.
깨끗한 그릇이니까 계속 쓰실 수밖에 없는 겁니다.
.
.
이렇게 1장이 마무리되고 2장에서 뜬금 없이 느부갓네살이 꿈을 꿨다고 합니다.
다니엘은 하나의 흐름으로 다니엘서를 써 내려갔을테니 두 구절은 깊은 상관 관계가 있겠죠?
이어지는 2장 2절도 함께 보면 보다 이해가 잘 됩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꿈 때문에 너무 머리가 복잡해서 바벨론의 박수와 술객과 점쟁이와 술사들을 불렀다고 나오죠?
한 흐름으로 다니엘서를 읽는 독자라면 예상할 수 있을 겁니다.
바벨론의 박수와 술객과 점쟁이들은 절대 그 꿈을 해석할 수 없다는 것을요.
귀신을 부리는 무당과 점쟁이는 과거는 맞힐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귀신이 미래도 맞힐 수 있을까요?
귀신이 느부갓네살이 꾼 꿈을 맞힐 수 있을까요?
그 꿈은 하나님께서 앞으로 역사를 어떻게 이끌어 가실지 예언의 개념으로 주신 것인데, 귀신이 어떻게 그 뜻을 맞힐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 무당과 점쟁이들은 죽기 싫으니까 계속 시간을 끕니다.
느부갓네살이 꿨던 꿈을 직접 말해달라고 하죠.
그럼 자신들이 쓰던 패턴이 있으니까 대충 끼워 맞히려는 심산이었습니다.
그런데 느부갓네살도 보통이 아닙니다.
“너희가 내 기분이 나아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대충 끼워 맞혀서 목숨을 부지하려는 모양인데, 어림도 없다.
나는 말해주지 않을 터이니 내가 꾼 꿈을 정확히 말하고, 해석도 정확히 내놓아라.”
이렇게 말합니다.
거기서 지혜자들이 또 제대로 답변을 못하자 그들을 죽여버립니다.
.
.
그렇다면, 하나님이 보여주신 미래의 뜻을 해석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두 가지로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1대지
첫 번째, 누가 미래를 밝히 알려주시는지 바로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11절에서 박수와 무당들은 꿈의 해석은 신들 외에는 그 누구도 할 수 없다고 합니다.
‘신들.’이라는 복수형을 쓰고 있죠.
유일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겁니다.
귀신을 숭배하는 자들이니 당연히 알 수가 없겠죠.
그러니 당연히 그 꿈도 해석할 수가 없습니다.
그 꿈은 하나님께서 주신 꿈인데, 하나님을 알지 못하니 알 수가 없겠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앞으로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 같으십니까?
우리 성도는 아직 내 앞에 일어나지 않은 일들을 믿음으로 이미 해석한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미래에 최종적으로 이루어질 일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재림이며, 우리의 완전한 구원입니다.
그런데 이 미래를 누가 열어 놓으셨으며, 누가 밝히 알려주시는지 제대로 알아야만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영원한 죽음에 갇혀 있던 우리를 구원하시고 영원한 생명이라는 밝은 미래를 열어주시는 분이 누구십니까?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을 제대로 알면, 오늘 하루 일어나는 내 앞의 일들이 해석이 될 겁니다.
모든 성도님들이 예수님이 누구신지 바로 알고 앞으로의 삶을 바로 해석하며 넘치는 은혜와 평강을 누리시길 축복합니다.
2대지
두 번째, 나의 미래를 이미 완성시키신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합니다.
본문 13절에서 느부갓네살의 꿈을 해석하지 못한 박수와 술객들이 다 죽임을 당합니다.
그 현장에 있었던 이 사람들 뿐만 아니라 바벨론에서 관리하는 지혜자들이 많이 죽어나갔을 겁니다.
그리고 13절의 후반절을 보면,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도 죽이려고 찾았다고 나오죠~~
다니엘서 저자인 다니엘은 왜 자신과 친구들을 죽이려고 찾았다는 대목을 썼을까요?
이 대목을 이해하려면 1장 21절을 또 함께 봐야 합니다.
다니엘서는 결론부터 던져놓고 시작하는 성경입니다.
시작부인 1장에서부터 다니엘을 페르시아 고레스 왕까지 지켜주신다고 못을 박고 시작합니다.
하나님만 의지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복입니다.
그 복은 지켜주심입니다.
그래서 다니엘은 오늘 본문 13절에서 당당하게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도 죽이려고 찾았더라.’라고
기록한 겁니다.
자신들을 찾아도 하나님이 지켜주시기 때문에 어찌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던 거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생의 위기 앞에서 하나님을 의지하시며 살아가고 계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미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의지할 때 우리의 다이어리의 기록은 달라집니다.
‘그 사람이 나를 넘어뜨리기 위해 찾았더라.’
‘환경이 나를 좌절시키기 위해 찾았더라.’
이렇게 기록된 구절 바로 뒤에,
‘하지만 하나님이 나를 지켜 주셨도다.’
라고 기록되는
여러분의 오늘 하루, 일평생이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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