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를 믿습니다.

사도신경 해설 시리즈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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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오늘은 거룩한 공교회를 믿습니다. 에 대해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사도신경을 고백하는데 신앙고백이 사도신경 말고도 또 있습니다. 니케아 신경, 아타나시오스 신경이 있습니다. 니케아 신경은 삼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고백했는데 마치 사도신경의 업데이트 버전 같은 그런 신앙고백입니다. 사도신경에는 교회에 대해서 거룩한 공교회를 믿습니다.라고 되어 있는데 니케아 신경은 좀 더 자세하게 우리는 하나의 사도적이고 거룩한 공교회를 믿습니다.로 고백합니다. 여기에 교회의 네가직 속성이 다 들어가 있습니다. 교회의 통일성 사도성 거룩성 보편성입니다. 오늘은 그래서 사도신경보다 좀 더 교회에 대해 자세하게 고백하고 있는 니케아 신경의 교회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이 종교개혁 기념주일인데, 사실 종교개혁에 대한 설교를 할까 사도신경을 할까 고민을 엄청 했는데 머리에도 안 들어오는 역사 이야기 이런 거 할 시간에 그냥 교회에 대한 교훈을 알려주는게 종교개혁의 의미에 더 합당한 것 같아서 교회에 대해 말씀을 나눠 보려고 합니다.
1- 교회는 하나다.(통일성)
신앙고백이 말하는 교회의 속성 첫 번째는 교회의 통일성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시면 사도바울이 고린도전서라는 편지를 고린도 지방에 있는 교회들에게 쓰면서 인사를 합니다. 3절에 이 교회들에게 하나님의 평강을 전하는데 2절에 보시면 고린도에 있는 교회와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은혜와 평강을 전합니다.
이 여기 나오는 주는, 주님은 바울이 믿는 주님이고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믿는 주님이고 각처에서 믿는 주님입니다. 바울과 고린도교회와 각처에 있는 사람들이 다 떨어져있습니다. 출신도 다르고 민족도 다릅니다. 그런데 같은 주님을 믿고 있습니다. 바울은 같은 주님을 믿고 있는 이들에게 같은 하나님으로부터의 평강을 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교회는 하나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교회가 하나라는 사실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교회가 믿는 분이 누구냐하는 문제와 연결되는 거예요. 교회는 하나인데 삼위 하나님을 믿고 유일하신 구주인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믿습니다. 이걸 인정하는 교회는 지역이 떨어져도, 국가가 달라도 하나입니다. 그래서 저 이집트에 있는 콥틱 교회도 우리와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 하나입니다. 남아공에 있는 교회도 우리와 하나입니다. 미국에 있는 교회도 우리와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 유일하신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구원하신 교회는 모두가 하나입니다.
이 하나라는 사실은 우리가 믿기 힘듭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지 않으면 하나라고 생각하기 힘들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앙고백은 하나인 교회를 믿는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듯이 교회가 하나라는 것을 믿어야 한다고 이야기 해요. 교회가 하나라는 것 통일성을 가졌다는 것은 믿음의 영역입니다. 이걸 믿지 않으면 우리는 선교 못합니다. 저기 우리가 모르는 나라에 세워봤자 우리와 하나인 교회라는 생각이 안드는데 어떻게 선교하겠어요? 반대로 이야기 하면 이렇게도 됩니다. 우리가 교회가 하나라는 이 신앙고백을 믿으면 선교해야 합니까 안 해야 합니까? 선교사님들 도와야 합니까? 내버려 둬야 합니까? 교회가 하나라는 믿음은 그냥 어떤 철학이나 학문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믿음생활에 실제로 영향을 미칩니다.
그리고 교회가 하나라면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라고 했잖아요? 저 사람이 나와 성별도 다르고 생각도 다르고 정치성향도 다르고 경제적인 수준, 학벌 ,나이 다 다르지만 나와 저 사람이 하나인 교회에 소속되어 있다면 함께 동역하고 교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가 하나인 것을 믿으면 내가 어울리고 싶은 사람과 어울리는 수준을 넘어서서 모든 성도와 가까워지고 동역자가 되기에 힘써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교회는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보낼 때 골치아픈 부분이 바로 성도간에 편가르기 하는 거였어요. 오늘 본문은 아닌데 12절에 나옵니다. 나는 바울파다. 나는 아볼로파다. 나는 게바파다. 이런식으로 나누는 것을 사도바울이 원하지 않았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예수님이 원하지 않는 것을 사도바울이 이야기 합니다. 교회가 하나라는 것을 알고 실천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세상은 자기 이익대로 자기 기호대로 서로 편먹고 자기 집단을 위해 싸우고 하지만 교회는 그 모습을 초월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눠진 세상이 교회안에서 통일됨을 이뤄야 합니다.
2- 교회는 사도적이다.(사도성)
그 다음으로 신앙고백이 말하는 교회의 속성 두 번째는 바로 사도성입니다. 아까 첫 번째 속성이 하나됨이라고 했습니다. 이 하나됨의 기준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 해야 할텐데요. 하나됨의 기준이 되는 속성은 바로 사도성입니다. 오늘 본문 보시면 1장 1절에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이 교회에 편지를 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사도와 관련이 깊습니다. 교회는 사도적이라는 거예요. 사도적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려면 사도가 뭔지 알아야 하는데 사도는 잘 아시는 것처럼 예수님께 훈련 받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은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사도는 예수님으로부터 가장 순수하게 말씀을 전수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사도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순수하게 전달받아서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했습니다. 그래서 사도성이 있다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있다는 말과 동일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신약성경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공부를 해보시면 알겠지만 신약의 가르침은 결국 구약의 가르침을 더 밝히 드러내고 해석하고 적용한 것입니다. 신약의 가르침은 구약에 기대고 있습니다. 구약이 있고 그다음에 신약이 있지만 신약의 조명 아래에서 구약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밝혀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도성이라는 것은 구약과 신약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있다는 뜻입니다. 너무 어렵죠? 어쨌든 사도성이 있다는 건 예수님의 가르침이 있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마태복음 16장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운다고 하셨을 때 우리가 생각하기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신앙고백 위에 이 교회를 세웠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네 맞습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는 그 고백위에 세웠습니다. 그런데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예수님은 사도성 위에 교회를 세우셨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왜냐면 베드로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순수하게 받은 사도이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면 예수님은 예수님의 가르침 위에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질문하나 하겠습니다. 지금은 사도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지금은 사도가 없습니다. 사도들이 구약성경 39권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입증했고 또 신약성경 27권을 완성했기 때문에 더 이상 사도가 없습니다. 성경 66권이 있기 때문에 사도가 필요 없어요. 요즘도 그러는지 모르겠는데 신사도운동이라고 해서 자기들이 사도처럼 하나님의 계시를 듣는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은 병원에 가셔야 합니다 과대망상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자기들이 사도라고 주장하는 건 성경 66권에 문제가 있다고 이야기 하는 것과 같습니다.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고 아무데나 말하는데 우리가 분별해야 합니다.
어쨌든 교회가 사도적이라는 것, 사도성이 있다는 것은 성경을 통해 예수님의 가르침을 잘 보존하고 있다는 거예요. 건강한 교회일수록 사도성이 강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잘 배우고 실천한다는 거예요. 무얼 통해서 배웁니까? 성경을 통해서 배웁니다. 그러면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그러면 그냥 성경을 잘 배운다고 하면 되지 굳이 사도성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있어요? 라고 합니다. 있습니다. 사도성이라는 것은 사도적인 전통을 잇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을 봐도 자기 마음대로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단이라고 합니다. 성경을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초대교회의 정신대로, 종교개혁가들이 연구한대로 읽어야 합니다. 그게 사도적인 전통을 이어가는거고 사도성이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신천지, 하나님의 교회는 지들은 성경대로 살아도 사도성이 없습니다. 카톨릭교회는 잘못된 교리를 주입해서 사도성을 많이 잃어버린 부실하고 타락한 교회입니다.
3- 교회는 거룩하다.(거룩성)
그 다음으로 신앙고백이 말하는 교회의 세 번째 속성은 거룩성입니다. 본문 2절에 보시면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교회는 거룩하다는 거예요. 그런데 고린도전서를 읽어보면 교회는 거룩하다는 말이 정말 이해하기 어렵다는 걸 알게 됩니다. 교회가 뭐가 거룩합니까? 고린도전후서 보면 자기들끼리 편가르기하고, 음란하고, 교회 안에 문제로 세상 법정에서 재판하고, 우상제물 문제로 싸우고, 예배 질서도 엉망이고 그렇습니다. 이걸 보면 고린도교회가 도대체 어떤 부분이 거룩한가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전혀 거룩하지가 않습니다.
교회는 죄인들이 있는 곳이고 현실적으로 100% 거룩하지 않습니다. 현실에 존재하는 교회 중에 100%거룩한 교회는 없습니다. 하지만 거룩하다고 할 수 있는 이유는 본문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리스도 예수님 때문에 거룩해졌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이 우리를 거룩하다고 하고 또 실제로 우리를 거룩하게 만듭니다.
거룩이 무엇인가요? 거룩에 대해 설명할 때 구분의 의미로 설명을 합니다. 거룩이라는 말은 구별되었다는 의미입니다. 히브리어 카도쉬의 의미도 구별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제가 이전에 수요 기도회 할 때 설명을 한 번 드렸는데 사물의 명칭이 그 사물의 속성을 전부 설명하지 않습니다. 수학이라고 했을 때 수 자가 셈 수자입니다. 셈하는 학문이라는 뜻인데 실제로 수학은 셈하는 것뿐 아니라 다른 것도 많이 합니다. 집합과 명제는 논리에 대한 부분입니다. 어떤 단어가 그 실체의 뜻을 다 설명을 못해줍니다. 그런 것처럼 거룩이 구별되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이걸로는 거룩이 다 설명이 안됩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죄와 구별되면 거룩이다.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물론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 죄가 들어오기 전에는 그럼 세상에 거룩함이 없습니까? 아닙니다. 세상에 거룩함이 있었습니다. 오히려 거룩함으로 가장 충만했습니다. 거룩이란건 하나님의 영광과 관련되어서 사용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면 거룩한거고 그렇지 않으면 거룩하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가 거룩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구별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쓰임 받으면 우리가 거룩한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때론 죄를 지을 때도 있고 실수할 수도 있지만 예수님을 믿어 무엇을 먹든지 마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면 우리는 거룩한 거예요. 현실 세계에 있는 교회가 죄인들이 있어서 부족해보이지만 하나님께 영광돌리기 위해 쓰임 받고 있으면 거룩한 거예요. 우리는 이 사명을 위해 구별되어서 이 자리에 있습니다.
그러면 교회가 거룩성을 유지하려면 영광스러운 교회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교회가 거룩성을 유지하는 방법은 바로 예배입니다.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께, 영광스러운 하나님께 예배 드릴 때 하나님의 거룩함, 그 영광스러움이 교회에 반영됩니다. 교회가 예배 할 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쓰임 받습니다. 복음을 전파할 때 사망 권세가 꺾이는 능력이 생기고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교회가 거룩함을 유지할 때 교회는 죄와 점점 멀어지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공동체가 됩니다.
4- 교회는 보편적이다.(보편성)
그 다음으로 네 번째로 신앙고백이 말하는 교회의 속성은 바로 교회의 보편성입니다. 우리가 사도신경에서 거룩한 공교회를 믿는다고 할 때 바꿔 말하면 보편교회를 믿는다는 것과 같다는 의미입니다. 보편적이라는 말은 평범하다 보통이다라는 뜻입니다. 교회는 보편적이어야 합니다. 특별한 교회는 없습니다. 같은 성경 말씀을 가지고 같은 교리를 고백하고 같은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이건 시간적으로도 그렇고 공간적으로도 그렇습니다. 시간적으로도 아브라함이 살 던 때에 아브라함이 이뤘던 믿음의 공동체나 지금 우리가 다니는 교회나 같은 교회입니다. 같은 하나님을 믿고 같은 구원의 약속을 기대합니다. 공간적으로도 예수님이 태어났던 이스라엘에 있는 교회나 당감동에 있는 당평교회나 똑같은 교회입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났던 유럽의 교회나 복음화율이 굉장히 낮은 일본교회나 똑같은 교회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똑같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특별한 교회는 없습니다. 교회는 보편적입니다. 말씀이 있고 세례와 성찬이 있으면 됩니다.
저는 상가 3층과 4층을 빌려서 예배 드리는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교회 목사님이 건물주 눈치를 봐야하는 그런 교회였습니다. 처음에 한 20명 모였던 것 같은데 지금은 한 80명 모여서 예배드립니다. 건물도 교회 건물을 사가지고 이사를 했습니다. 어릴 때 제가 다닌 교회는 아주 작았기 때문에 연합 수련회 가면 우리 교회에서 몇 명 안 갑니다. 그래서 그게 되게 부끄러웠어요. 다른 교회 애들은 교회 버스 있어갖고 애들이 막 수 십 명씩 우르르 내리고 저녁에 집회 끝나면 교회 장로님들 와서 피자랑 치킨이랑 막 싸들고 오고, 우리 교회는 미조직 교회라서 장로님도 없었어요. 저는 그래서 우리 교회는 뭔가 초라한 교회 같고 다른 교회는 멋져 보이고 그런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제가 전도사 사역을 했을 때 포도원교회라고 성도 수천명 되는 교회에서 사역을 했는데, 그 때 제가 맡은 초등학생 3, 4학년이 180명 정도 됐습니다. 저는 걔네들을 연합수련회 보내면 편한데 한 번도 그렇게 한 적이 없고 제가 교회에서 수련회 다 했습니다. 왜냐면 어릴 때 생각이 나는 거예요. 걔네들 데리고 가서 괜히 다른 작은 교회 아이들 장로님 한 분 안 계시는 교회 아이들이 상처 받으면 어떻하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요. 초등학생들은 생각이 없기 때문에 너희 교회 이것밖에 없나 이런 말 할까봐 어린시절 저 같은 아이가 수련회 와서 상처 받을까봐 연합수련회를 안보내고 제가 다 준비해서 재밌게 수련회를 했습니다. 저한테 이런 상처, 트라우마가 있는데 이건 교회의 보편성이 안 믿어지니까 상처를 받는 거예요. 사람이 많은 교회나 적은 교회나 다 똑같은 교회입니다. 상처받는 건 보편성이 안 믿어져서 그런 거예요. 교회는 보편적입니다. 자기 모교회를 떠나서 자꾸 큰 교회로 갑니다. 그 교회에 특별한 뭔가 있다고 생각하고 가는데 그건 모교회에 문제가 있어서 그런게 아니라 공교회 신앙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보편성을 믿지 않는 거예요. 사도신경을 입술로 고백하지만 안 믿는 거예요. 우리는 공교회를 믿습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결론
설교를 맺겠습니다. 우리는 하나의 사도적이고 거룩한 공교회를 믿어야 합니다. 이것을 믿고 지킬 때 신앙의 선배로부터 물려받은 이 귀한 당평교회를 여러분이 더 건강하게 세워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함께 찬송하고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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