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사랑하는 '법'

킹덤스토리 해설 시리즈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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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수요기도회에 오신 성도님 여러분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이 이전에 왜 약속의 땅을 차지하지 못하고 실패했는지 말씀해주셨습니다. 이 땅을 차지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말씀해주셨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다시 들려주시는 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준행하는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신명기 4장의 내용입니다. 그리고 신명기 5장에서는 십계명 율법에 대해서 설명하고 신명기 6장에서는 이 말씀에 근거해서 하나님만을 사랑해야 한다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어떤 방법으로 사랑을 실천하도록 하셨는지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1- 하나님께서 사랑의 말씀으로 가르치셨다.
(설명)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첫 번째 교훈은 하나님께서 사랑의 말씀으로 가르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랑입니다. 사랑이라는 주제 자체가 성경에서 아주 중요한 주제이고 기독교가 말하는 대표적인 정신 혹은 덕목이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랑에 대해서 알고 사랑을 실천하는 일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세상이 말하는 사랑은 주로 감정과 욕망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합니다.
신명기 5장에 보시면 십계명이 나오는데 이 십계명의 요약은 아주 잘 아시는 것처럼 사랑입니다. 1계명부터 4계명까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5계명부터 열 번째 계명까지 이웃사랑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이 사랑에 대해서 가르치고 나서 6장 1절에 보시면 이 사랑의 계명을 이스라엘 백성이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서 행할 것이라 했습니다. 6장 2절에 보시면 너와 네 아들과 네 손자들이 그러니까 모든 세대를 아울러서 이 명령을 지켜야 합니다. 이것을 지키는 이유는 2절 말미에 나온 것처럼 ‘네 날을 장구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3절에 나온 것처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크게 번성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랑의 율법에 따라 살아가면 장수하게 되고 번성하게 될 것이라 말씀합니다. 율법에 따라 살아가는 방식으로 그 삶을 복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주시는 것은 그저 우리를 속박하고 통제하기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는 율법을 통해서 죄 짓는 일을 통제하고 사랑하는 삶을 살게 되겠지만 율법은 우리의 삶을 형통한 길로 복된 길로 안내합니다.
이 이야기가 사실인지는 우리가 율법의 반대로 살았을 때 어떤 삶이 되는지를 살피면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모르고 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인생이 길 없는 방황이 계속됩니다. 우리가 부모를 공경하지 않고, 사람의 생명을 가볍게 여기고, 간음 때문에 가정이 깨지고 서로의 것을 탐내고 도둑질하면 우리의 삶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욕망에 따라서 살면 그게 처음에는 좋아 보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삶을 파괴하는 지름길이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신 사랑의 율법에 근거해서 살 때 우리 삶이 참으로 형통하고 복되게 됩니다.
이 십계명 중에 가장 중요한 부분은 어디입니까? 1계명인 것 같지만 십계명 중에 가장 중요한 부분은 바로 십계명 서론입니다. 신명기 5장 6절을 보면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라 이 부분이 제일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애굽 땅에서 구원해야 주셨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십계명을 지키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사랑을 보여주셨고 이제 이스라엘 보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십계명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바로 복음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여 주셨기 때문에 구원자 되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적용) 저는 법학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하지만 일반인들이 주로 하는 생각은 이 법이라는 것은 사회 질서를 보존하고 국민의 재산과 생명을 지키고 사회 번영의 기반을 마련하도록 하는 규칙이라고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잘 아는 사실이지만 이 정도 법은 정말 최소한입니다. 인류가 멸망하지 않고 보존될 수 있도록 하는 최소한의 안전장치입니다. 하나님께서 믿는 사람이건 안 믿는 사람이건 이 율법에 대한 양심을 심어주셨기 때문에 사람 사는 세상엔 다 이 최소한의 법이 있고 하나님께서 이것을 통해서 이 땅의 생명들을 보호하십니다. 이런 최소한이 없었더라면 죄인으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인류는 단 하나도 남지 않고 싸우다가 전쟁하다가 다 죽었을 것입니다.
이 최소한의 토대 위에 우리는 사랑의 법을 쌓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의 율법을 실천하며 살아야 합니다. 사랑의 법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삶이 최소한만 지키며 사는 사람들이 보기에 행복하고 뭔가 다른 점이 보인다면 우리는 이 땅위에서 사랑의 법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게 됩니다. 율법을 지키는 일은 귀찮은 일, 딱딱한 일이 아니라 사랑으로 나라를 세우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해서 늘 예배하고 기도하는 삶을 살고 이웃을 사랑해서 이웃에게 늘 감사하고 섬기며 살아가는 우리의 삶을 통해 이 땅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고 이런 삶을 살면서 사명 감당하라고 하셨고 이 명령은 우리에게도 동일합니다. 우리가 구원 받은 이유는 세상에 나가서 하나님의 사랑의 율법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입니다.
2-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율법에 순종해야 한다.
(설명)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두 번째 교훈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율법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보통 율법에는 세 가지 기능이 있다고 말합니다. 로마서에서 주로 말하는 거것처럼 우선 율법에는 자신이 얼마나 죄인인지 깨닫는 기능이 있습니다. 그리고 율법은 아까 잠시 언급한 것처럼 사회적 기능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건 안 믿건 모든 사람들 마음 가운데에는 율법의 흔적이 조금씩 남아있고 율법을 따르고자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기 때문에 사회의 질서가 최소한으로 유지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율법의 기능은 감사와 사랑의 기능입니다. 율법에 순종함으로써 하나님께 감사하고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소유하시고 모든 일을 능히 하실 수 있기 때문에 우리가 뭔가 하나님의 호주머니를 채워준다고 해서 하나님이 기쁘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한다고 해도 예를 들어서 산을 옮기고 바다를 메운다고 해도 그걸로 하나님을 조금도 기쁘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바로 율법에 순종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는 존재로 세우시기위해 우리를 구원하시고 사랑의 율법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이 율법을 능동적으로 지킬 때 하나님은 우리를 기뻐하십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 사람을 기쁘게 하고 싶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애인이 있거나 배우자가 있으면 내가 좀 손해보고 힘들더라도 그 사람을 기쁘게 하고 싶습니다. (예화) 제가 결혼 준비할 때 신대원 다니는 학생 전도사여서 금전적으로 여유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결혼을 먼저 한 신대원 동기 형님이 결혼할 때 예물 꼭 셋트로 해야 한다고 그거 안하면 후회하게 될꺼라고 제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지금 아내랑 예물을 보러 갔는데 형편에 맞춰서 한다고 했는데 귀고리 목걸이 반지 하는데만 너무 비싸가지고 셋트로 팔찌가 있었는데 그걸 뺐습니다. 지금 아내는 괜찮다고 했는데 그게 제가 너무 마음에 걸렸습니다. 내가 이거 때문에 평생을 잡혀 살지 않을까 걱정도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없는 돈에서 지출을 줄이고 줄이고 줄여가지고 돈을 모아서 몇 달 뒤인가 그 가게 가서 그 팔찌를 사서 아내한테 딱 내밀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릅니다. 지난 몇 달 동안 지출을 줄여가지고 저는 사는 게 너무 힘들었지만 예비 신부가 너무 좋아하니까 그 힘들었던 것이 다 날아갔습니다. 나를 사랑하는 대상에게 혹은 내가 사랑하는 대상에게 나의 것을 헌신해서 그가 원하는 것을 해준다는 것은 힘든 일이지만 반면에 너무나도 기쁜일입니다.
때론 율법대로 사는 일이 고달플지 모르지만 결국에는 그게 우리 삶의 가장 큰 기쁨이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마음을 다해 뜻을 다해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할 때 감정만으로 사랑할 수 없고 의지만으로 사랑할 수 없습니다. 이것에 더불어 힘도 더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목숨도 다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율법대로 사는 것은 마음과 힘과 뜻과 심지어 목숨가지 다해서 살아야 하는 삶입니다. 우리 삶 전체가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이 어렵습니다. 힘이 듭니다. 힘을 다하라고 했으니까 당연히 힘이 듭니다. 너무 손해가 큰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것은 쉬우셨겠습니까? 나 같은 죄인을 굳이 아들 예수님까지 희생시켜가며 그 큰 고통을 감내시켜 가며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엉뚱한 상상을 한 번 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타락한 인류를 다 멸망시키고 새로운 인류를 창조해서 그들의 사랑과 경배를 받는 일이 쉽겠습니까? 아니면 하나 밖에 없는 아들 예수님을 이 땅에서 보내시고 희생시켜서 또 성령님을 통해 이것을 믿게 하시고 구원하시는 것이 쉽겠습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멸망시키는 것은 하나도 어렵지 않습니다. 한 사십주 사십야 정도만 있으면 홍수로 전인류를 몰살 시킬 수 있습니다. 창조도 어렵지 않습니다. 육지 동물과 사람을 만드는데 하루면 됩니다. 예수님을 이땅에 보내시기로 계획하려면 너무나도 오랜 세월이 걸립니다. 수 많은 선지자를 통해서 예언하시고 예수님을 보낼 백성을 선택하고 예수님을 오실 길을 예비하는 것이 세월이 얼마나 걸렸습니까? 예수님의 삶은 쉬웠습니까? 하나님 입장에서는 다 멸망시키고 새로 시작하는게 낫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가장 어렵고 비효율적인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원래 복음은 가장 어려운 헌신과 가장 비효율적인 일 위에 세우졌습니다. 복음에는 이득이 없습니다. 효율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희생하셔서 나 같은 죄인이 구원 받았는데 이게 하나님 입장에서 뭐가 그렇게 큰 이익인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너무 손해 보는 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렇게 손해 보셨습니다. 우리가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무 손해 보는 것 같고 너무 비효율적인 삶을 사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살고 싶지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생각해보면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얼마나 손해 보셨습니까? 거기에 비하면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통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건 손해라고 하기도 너무나 부끄러운 것입니다.
(적용) 우리가 이걸 알면서도 이게 잘 안됩니다. 그래서 기도하며 성령충만을 구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교회로부터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듣고 동역자의 지도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 힘으로 안 되기 때문에 기도가 필요하고 공동체가 필요하고 성령충만이 필요합니다. “제가 하나님 더 사랑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마음과 감정만으로 사랑할 수 없는 분인인데 율법에 순종해야 하는데 이게 안됩니다. 도와주십시오”라고 기도해야 하고 동역자에게 더 지도해주고 가르쳐달라고 해야 합니다. 공동체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예전에 페이스북을 하다가 어느 목사님의 글을 본적이 있는데 자신이 목사지만 동시에 죄인이기 때문에 노회의 치리가 필요하다고 그렇게 고백한 것을 보았습니다. 저렇게 목회를 오래하시고 기도와 묵상의 시간이 태산같이 쌓인 분도 죄인이라 고백하고 자신을 치리할 노회가 필요하다고 하시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여러분 오늘 여러분이 이 자리에 모인 것도 공동체를 통해 하나님 더 사랑하기 위해 모이신 줄로 믿습니다. 너무나 잘 오신 것입니다.
3- 사랑의 말씀을 가르쳐야 한다.
(설명) 그 다음으로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마지막 교훈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랑의 말씀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6절에 보시면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라고 말씀합니다. 원문에는 그냥 마음에 둔다고 되어있습니다. 영어성경 번역본들도 오늘 네게 명하는 이 명령을 마음에 있게 하라고만 되어 있습니다. 마음에 새기라는 번역은 한글 번역에만 있는 독특하고 문학적인 번역입니다. 우리는 보통 뭔가를 명심할 때 마음에 새긴다는 표현을 씁니다. 왜 마음에 새긴다고 표현을 하겠습니까? 우리 마음에는 이미 여러 가지 가치관이나 생각들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내용이 비집고 들어가려면 기본적으로 노력이 필요합니다. 마음에 뭔가를 새기려면 강력한 동기가 필요하고 반복이 필요합니다. 거기에 맞는 환경도 필요합니다. 마음에 새겨줄 지도자나 교육자가 필요합니다. 마음에 뭔가를 새기는 일은 마음에 뭔가를 두는 일은 삶의 모든 역량을 집중시켜야 가능한 일입니다.
6절에 마음에 새기는 일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7절에는 자녀에게 이 말씀을 가르치는 일에 대해서 나옵니다. 그러니까 6절에 내 마음에 새기는 것, 다른 이에게 가르치는 것은 동시에 가야 합니다. 혹은 내 마음에 새기기 위해서 다른 이에게 가르치는 작업이 함께 이뤄져야 합니다. 7절에 보시면 집에 앉았을 때, 길을 갈 때, 누워 있을 때, 일어날 때, 말씀을 강론해야 합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 가르치는 부모나 듣는 자녀나 모든 말씀을 마음에 두고 새기는 과정이 자연스럽게 될 것입니다. 7절에 모든 상황에 율법을 마음에 새기는 것을 말한다면 8절에는 모든 장소에서 율법을 마음에 새기는 것에 대해 말합니다. 6절에는 집에 있을 때 길을 갈 때 누워 있을 때 일어날 때 등 어느 상황에서든지 율법을 마음에 새겨라고 이야기하고 7절에는 이것을 손목에 매고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장소에서 율법을 마음에 둬야 할 것을 이야기 합니다. 실제로 유대인들은 머리와 손목에 조그만 통 같은 것을 답니다. 이것을 테필린이라고 하는데 여기에 성경구절을 넣어서 늘 율법을 준수하며 살기 위해 노력합니다. 유대인은 그들이 가진 율법을 통해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그 테필린은 구원과는 전혀 상관없이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유대인들이 율법과 가까이 하기 위해 애쓰는 것은 우리가 본받아야 합니다. 어느 상황이든 어느 장소든 늘 율법의 정신대로 살기를 애써야 합니다.
지금 본문에 자녀에게 성경을 가르치라는 말이 나와 있어서 찔리는 부분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제가 다른 이에게 율법을 가르치자고 돌려 돌려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저는 일주일에 한 번은 가정 예배를 드리려고 노력을 합니다. 횟수도 더 늘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쩔 때는 이게 힘이 듭니다. 교회에서 설교하고 가르치는 게 어떻게 보면 저의 업이기 때문에 집에 오면 이걸 좀 쉬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집에서 좀 쉬고 싶은데 세 살 먹은 제 딸이 성경책을 들고 와서 제 앞에 펼칩니다. 어제 가정예배 인도했는데 오늘 또 예배 인도 하라는 겁니다. 그럴 때마다 너무 귀찮습니다. 예배가 장난도 아니고 지가 하고 싶을 때마다 내가 인도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기 입장에는 제가 성경책을 이리 저리 펼쳐서 노래 부르고 뭘 말하는 게 신기하고 그게 보고 싶은 것 같습니다. 제가 목사가 되가지고 예배드리지 말자고 할 수도 없고 하는 수 없이 찬송가 한 장 펼쳐가지고 찬송가 부릅니다. 글자도 못 읽으면서 성경 본문도 자기가 원하는 부분을 펼쳐야 합니다. 본문이 바로 정해지기 때문에 설교가 쉽지 않습니다. 펼쳐서 학교 다닐 때 배웠던 거를 최대한 기억해서 설교하다가 기도하고 끝냅니다. 오늘 본문에서 언제 어디서나 자녀에게 말씀을 가르치라고 말하지만 이걸 하는 게 쉽지가 않습니다. 여기 계신 성도님들 직장 마치고 집안일 하고 좀 쉬어야 하는데 가정 예배드리려고 하면 얼마나 피곤하겠습니까? 쉽지 않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렇게 하면 힘들다는 것을 모르실까? 아마 하나님도 아실 것입니다. 가정에 말씀을 가르치고 주일학교에서 봉사하면서, 그리고 셀에서 봉사하면서 혹은 새가족에게 봉사하면서 또 전도하면서 다른 이에게 복음을 말하고 말씀을 가르치는 것은 쉬운일이 아닙니다. 어렵고 귀찮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해야 우리가 삽니다. 이렇게 해야 이 땅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공동체를 세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공동체를 세우는 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뤄집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살 때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며 살아야 합니까 아니면 죄와 욕망이 가득한 사탄의 나라를 이루며 살아야 합니까?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며 살아야 합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며 살지 못하는데 어떻게 죽어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겠습니까? 이 일이 비록 어렵지만 분명한 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녀들에게, 다음세대에, 필요한 이들에게 말씀을 가르치면서 사랑의 공동체를 만들어야 합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일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우리가 세운 사랑의 공동체는 커질 것입니다. 전도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일종에 말씀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을 전하면서 이 복음을 듣는이가 교회라는 사랑의 공동체로 들어오게 해야 합니다. 교회로 들어와서 율법에 순종하는 백성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불신자를 가르치는 일, 이 전도라는 일도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지 모릅니다. 전도하다보면 항의도 들어오고 거절당하는 순간도 웃음으로 견뎌야 합니다. 전도할 때 방해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몸이 약해지거나 집에 무슨 일이 있어서 감정이 조절이 안되거나 하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내가 무슨 전도를 하냐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순간을 버티면서 복음을 전하는 게 만만치가 않습니다. 전도해야 할 이유는 한가지 밖에 없는데 전도 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수십가지가 됩니다. 바빠서, 아파서, 집안에 일이 있어서, 약속이 있어서, 열매가 없어서, 부끄러워서, 돈이 없어서, 말을 못해서, 믿음이 약해서, 기독교의 이미지 개선을 위해서 등등 별의별 이유가 다 있습니다.
서울대 고고학과 교수님이 아주 인상적인 일을 경험했다고 합니다. 교수님이 어느 산에서 고고학 발굴 작업을 열심히 하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온 몸에 땀과 흙과 먼지 범벅이었습니다. 그 산을 지나가던 어떤 어머니가 자기 자녀한테 이렇게 이야기 했다고 합니다. “너 공부 안하면 저 아저씨처럼 된다.” 직업에 따라 사람을 판단하는 가치관도 참 잘못됐지만 고고학 발굴 작업하는 것도 못 알아보는 안목도 없습니다.
전도도 이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불신자에게 말씀을 가르쳐서 사랑의 공동체를 세우는 일이 어렵고 힘들어도 얼마나 가치 있는 일입니까? 남들 보기엔 전단지 뿌리고 호객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치열한 영적인 전투가 있고 생명의 나눔이 있습니다. 사랑의 공동체를 세우는 주춧돌을 놓고 있는 것입니다. 고고학자가 흙먼지를 붓으로 털어서 도자기 한 조각 종이 쪼가리 하나 찾는 것이 학계에 영향을 미칠지도 모르는 데 이와 같은 것입니다.
결론
말씀을 맺겠습니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님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사랑의 율법을 주셨습니다. 이 율법에 사랑으로 반응하고 순종할 때 우리에게 참된 복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가르쳐서 사랑의 공동체를 세워 이 땅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를 이뤄야 합니다. 사랑의 율법의 순종하여 참 된 복을 누리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다함께 찬양하고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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