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이 없는 나라

킹덤스토리 해설 시리즈   •  Sermon  •  Submit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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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수요 기도회에 오신 성도님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차별 없는 나라입니다. 차별이라는 말이 정말 어렵습니다. 차별금지법이라는 게 국회에 자꾸 올라가고 복음을 지키는 교회들이 이것을 막는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차별을 금지하는 게 나쁜 건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차별이라는 말을 쓰는 것이 참 부담스럽습니다. 저는 ‘차별하지 않는다.’라는 말보다는 사회적 약자를 더 배려하고 사랑해야 한다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나이가 어리다고 해서, 혹은 나이가 많다고 해서, 돈이 없거나 학식이 없다고 해서 마땅한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반면에 동성애자들에게 정상인과 같이 혼인신고를 안해주는건 차별이라 할 수 없습니다. 결혼이라는 원칙은 남녀가 하는 것 이기 때문에 이것은 원칙을 지키는 것이지 차별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교단 같은 경우에 여성분들께 목사 안수를 해주지 않는 것 이것도 차별이 아닙니다. 우리 고신교단에서 성경에 근거한 신학적인 이유로 여자에게 목사 안수를 주지 않습니다. 여성을 무시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여성분들은 전도사님으로 섬기면 됩니다. 이런 것들은 차별이 아닙니다.
차별이라는 것이 사회적으로 예민한 부분이고 이슈가 되기 때문에 제가 강단에서 쓰기에 부담스러운 단어지만 오늘 설교에서 차별이라는 단어의 뜻은 ‘사회적 약자들이 누려야 할 것을 못 누리게 하는 것’입니다. 이점을 감안하시고 설교를 들으시면 되겠습니다. 오늘은 차별이 없는 나라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을 나눠보고자 합니다.
1- 하나님께서 차별의 문제를 고민하게 하신다.
(설명)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첫 번째 교훈은 하나님께서 차별의 문제를 고민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민수기에는 인구조사하는 장면이 두 번 나옵니다. 1장에도 인구조사를 하고, 2장에도 인구조사를 합니다. 이 인구조사는 주로 이십 세 이상 전쟁에 나갈 남자를 계수합니다. 레위인은 출생 후 한 달이 된 남아부터 인구를 계수합니다. 인구를 계수하는 이유는 군사적인, 경제적인 목적도 있겠지만 약속의 관점에서 바라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창세기 12장에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민족에 대한 약속이 이뤄졌는지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인구조사 한 것을 보면서 실제적으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민족에 대한 약속이 이뤄진 것을 보게 됩니다. 이 민족을 통해 그리스도가 오시고 이 민족을 통해 교회가 세워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민족에 대한 약속과 더불어 하신 약속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땅을 주신다고 하는 약속입니다. 이 땅은 민족이 번성하는 토대가 되고, 이스라엘이 이방민족을 몰아내고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사역의 장이 되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모형이 됩니다. 구약에서 땅의 가치는 경제적으로도 중요하지만 믿음의 관점에서도 중요합니다.
26장에서 인구를 계수하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으로 생긴 이 민족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위한 계수도 될 것입니다. 그런데 27장에 문제가 생깁니다. 26장에서 보듯이 이스라엘은 남자를 중심으로 인구를 계수하고 여기 근거해서 가나안 땅을 분배 받을 텐데 27장에 이 분배에서 제외될 위기에 처한 사람들이 나옵니다. 바로 슬로브핫의 딸들입니다.
슬로브핫이라는 사람은 므낫세의 후손입니다. 그는 광야에서 죽었고 그의 자녀들은 딸들 밖에 없었습니다. 만약에 슬로브핫의 자녀 중에 아들들이 있었더라면 그 아들들이 땅을 분배받았을 것입니다. 그 아들들이 누이가 시집 가기전에 그 생활을 책임져 주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집안에는 아들이 없고 딸만 있습니다. 아직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딸에게 땅을 분배하는 것은 생소합니다. 이스라엘은 남자를 중심으로 땅을 분배하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여자가 남자에게 시집을 가면 여자가 그 가정에 속해서 거주하고 생활할 수 있기 때문에 여자는 시집 가면 되고 시집 갈 때 결혼 지참금을 주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문제를 풀어나가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서 안타까운 부분이 있었습니다. 이 슬로브핫의 딸들은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습니다. 민수기 36장 6절에 모세가 슬로브핫의 딸들은 원하는 대로 결혼하되 같은 지파에만 시집을 가라고 합니다. 이 말은 아직 슬로브핫의 딸들이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고대에는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대부분 결혼을 일찍 했습니다. 최소 20살 안쪽으로는 다 결혼을 했을 것입니다. 이 슬로브핫의 딸들이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이들이 나이가 아주 어렸다는 것을 말합니다. 저 아이들이 아버지도 없으면 경제적으로 어려울텐데 빨리 시집보내는 게 좋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정도 나이도 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냥 일반적으로 추측하기를 한 고등학생 정도 나이면 되어도 빨리 시집을 보냈을 텐데 그 정도 나이도 되지 않아서 시집을 가지 않았습니다. 대략 계산을 해서 슬로브핫의 딸들이 다섯 명인데 다 연년생이라 치더라도 첫째인 말라가 16세라고 치면 동생들은 15세 14세 13세 12세 이정도일 것입니다. 이들이 만약 어머니가 있었다면 그러니까 슬로브핫의 아내가 있었다면 이스라엘의 계대 결혼이라는 원칙에 따라 슬로보핫이 죽었을 때 슬로브핫의 형제나 친척과 다시 재혼을 했을 것이고 그랬다면 기업을 받니 못 받니 이런 논쟁조차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슬로보핫의 딸들은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어머니도 없었을 것입니다. 고대에는 의학기술이 뛰어나지도 않고 위생개념이 잘 발달하지도 않아서 젊은 날에 죽는 경우가 지금보다 많았을 것입니다. 라헬처럼 아기를 낳다가 죽었는지 아니면 무슨 이름 모를 병에 걸려 죽었는지 모르지만 슬로브핫의 아내는 세상을 떠나고 없는 상태입니다. 이제 엄마도 없고 아버지도 없는 중학생, 초등학생 정도 되는 아이들이 가나안 땅에 가서 땅을 분배를 받지 못하면 살 수가 없는 그런 상황입니다.
이 어린아이들의 문제는 당시에 꽤 심각한 것으로 여겨진 것 같습니다. 남성 중심으로 재산을 물려받는 당시 관행으로 해결하기 힘듭니다. 원칙대로 하자니 애들이 살수가 없고 관행을 어기자니 또 걸리는 것이 있습니다. 당시로서 굉장히 어려운 이슈였습니다.
아마 기억을 하실 텐데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있습니다. 출애굽기 18장에 보시면 모세가 백성들의 문제를 혼자서 일일이 해결하려고 하니까 하루 종일 그것만 붙들어야 해서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모세의 장인이 어떻게 충고했습니까? 백성들을 지도할 사람으로 십부장, 오십부장, 백부장, 천부장을 삼아서 백성들의 문제나 민원을 해결하라고 했습니다. 십부장 선에서 안되면 오십부장, 오십부장 선에서 안되면 백부장, 백부장 선에서 안되면 천부장, 천부장 선에서 안되면 모세한테 이 문제를 가져갑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슬로브핫의 딸들은 이 문제를 그냥 십부장, 백부장한테 이야기 한 것이 아니라 회막 문에서 모세와 제사장 엘르아살과 지휘관들과 온 회중 앞에서 이야기 합니다. 지금으로 치면 교단 총회 앞에서 이야기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의문이 듭니다. 왜 천부장이 보고하거나, 므낫세 지파의 대표가 보고하거나 하지 않고 이 어린아이들이 증언하도록 했겠습니까? 이 문제는 최초로 십부장에게 제기 되었을 것이고 그 다음 십부장이 해결안되니까 오십부장, 백부장 천부장까지 갔을 그런 문제인데 이 심각한 문제를 중학생, 초등학생 아이들이 나와서 총회석상에서 말하게 하고 있습니다. 여기엔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이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어린 애들이 부모도 없고 시집을 보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당장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먹고 살아야 하는데, 얘네들 어떻게 할꺼냐? 하고 보여주는 것입니다. 물론 모세가 그냥 바로 기도해서 하나님한테 사정을 이야기하고 땅을 그냥 받도록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납득을 하는 과정이 중요할 것입니다. 왜냐면 슬로브핫의 딸들이 기업을 가져가면 그만큼 다른 사람이 가져갈 땅은 줄어듭니다. 그래서 이 아이들이 얼마나 어린지, 사정이 얼마나 딱한지 공식적인 자리에서 보여주며 긍휼과 이해를 요청하는 것입니다. 본문을 살피면서 이런 디테일을 보면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는가 하는 상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도자들로 하여금 약자들을 돌보는 문제, 차별의 문제에 대해서 고민하도록 하셨습니다. 생각해보면 하나님께서 이 모든 사정을 다 아시지 않습니까? 예수님 말씀에 의하면 우리의 머리털 하나까지도 다 세신 바 되셨는데 슬로브핫의 딸들의 형편을 다 아십니다. 그러면 먼저 명령을 내려서 저 딸들에게 땅을 주어라 할 수 있는데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지도부와 그 회중이 이 약자들을 위해 고민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차별 받는 이들, 약자들을 어떻게 대할지 고민하도록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나라의 백성들이 차별 없는 나라를 세우도록 하셨습니다.
(적용) 우리에게도 이런 고민이 있습니까? 뉴스나 책에 나오는 거창한 담론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삶의 순간 순간 마다 차별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됩니다. 돈이 많은 이나 적은 이를 두고 고민하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두고 고민합니다. 어르신과 아이를 두고 고민을 합니다. 차별을 없애기 위해서는 우선 나도 모르게 차별을 하고 있는 나의 생각과 마음을 먼저 점검해야 합니다. 차별에 대한 고민이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차별에 대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공평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따라가게 됩니다.
2- 하나님께서 차별의 문제를 해결하신다.
(설명)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두 번째 교훈은 하나님께서 차별의 문제를 해결하신다는 것입니다. 슬로브핫의 딸들이 회중앞에서 우리 아버지 돌아가시고 아들이 없어 기업을 받지 못한다고 이야기를 하고 모세는 이 이야기를 듣고 하나님 앞에서 사연을 아룁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판결을 내리십니다. 땅은 원래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선물이기 때문에 땅을 분배하는 문제의 최종 결정권자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슬로브핫 딸들의 말이 옳다고 합니다. 약자들의 편을 들어주셨습니다. 8절에 사람이 죽고 아들이 없으면 그의 기업을 딸에게 돌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다음 9절부터는 자식이 아예 없을 경우 형제에게 주고 형제도 없으면 사촌에게 사촌도 없으면 가까운 친족에게 주도록 하고 이것을 판례가 되게 하셨습니다. 오늘 설교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슬로브핫의 딸들에게 처한 문제를 해결해주셨다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을 보시면 하나님의 관심은 약자들에게 있습니다. 이 약자들이 약자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으며 살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신명기에 객과 고아와 과부라는 말이 여섯 번 등장합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고대에 객과 고아와 과부는 사회적 약자의 상징과도 같은 말입니다. 거주자가 없고 돌볼 부모가 없고 부양해줄 남편이 없는 사람은 그 시대의 사회적 약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절기를 지킬 때 객과 고아와 과부와 함께 즐거워하도록 하고 감람나무나 포도나무에서 수확을 할 때도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해 남기라고 하셨습니다.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해 십일조를 내도록 했습니다. 이렇게 약자들을 돌보고 나서 신명기 26장 13절부터 16절까지 해서 하나님께 복을 구하는 기도로 아뢰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지속적으로 차별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분입니다.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가지신 분입니다. 약한 이들이 차별받으며 천대 받으며 살지 않도록 지키십니다.
이것은 복음의 원리와도 맞닿아 있습니다. 슬로브핫의 딸들이 땅을 요구할 수 있는 것은 믿음의 행위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 땅을 약속하셨고 그들도 이 약속 안에 있기 때문에 땅을 요구할 수 있습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고 믿음으로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부모가 없다는 이유로 시집을 안간 여자라는 이유로 어리다는 이유로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 땅을 받지 못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 어떤 조건이 아니라 믿음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얻는 것 이것이 바로 복음의 원리입니다. 이 복음의 원리 안에서 돈이 많든 돈이 적든 나이가 많든 나이가 적든 학식이 있든 없든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얻을 수 있습니다. 교회는 이것을 위해 남녀노소 빈부귀천 상관 없이 복음을 전하며 전도합니다. 복음 앞에 누구나 평등하고 복음은 절대 사람을 차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공평한 복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는 교회 안에서건 교회 밖에서건 차별을 하지 않습니다. 바로 이 복음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차별의 문제에 관심을 두시고 차별을 없애려 하시는 것도 바로 복음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얻는 일은 믿음으로 선물 받는 것이지 개개인의 가치를 판단해서 주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도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써 그 땅을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이유 때문에 차별을 싫어하시고 사회적 약자에게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나라에 어떤 차별적 기준이 장벽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이 장벽을 허물어 누구나 복음을 누리고 하나님 나라를 구할 수 있게끔 해야 합니다. 가난하건 못 배우건 외모가 어떻든 인종이 어떻든 차별 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이 차별을 해결하고 싶으신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적용)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얼마나 차별이 심한 세상입니까? 이런 세상 가운데 우리가 차별의 장벽을 허물어서 차별 없는 나라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세상은 모든 개인에게 가치를 매겨서 판단하고 차별합니다. 어떤 공동체에 소속되려면 그 공동체에 얼마나 이익을 가져다주는지 자기 가치를 증명해야 합니다. 세상 나라는 이렇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믿음으로 얻는 나라라는 것을 보여줘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믿음 외에 그 어떤 가치 판단도 없습니다. 우리는 이 나라를 보여주기 위해서 차별을 반대합니다.
3- 하나님께서 영원히 차별 없는 나라를 세우신다.
(설명) 마지막으로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하나님께서 영원히 차별 없는 나라를 세우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복음의 원리에 따라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시고 슬로브핫의 딸들에게 기업을 주시기로 응답하셨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생깁니다. 만약에 슬로브핫의 딸들이 자기가 속한 므낫세 지파 외에 다른 지파 남자에게 시집을 가버리면 슬로브핫의 딸들이 받은 땅이 다른 지파로 넘어가버립니다. 시집을 가면 남자 집안 쪽으로 재산이 편입되지 않습니까? 만약에 여자가 재산을 물려받은 경우가 계속 되면 그 지파의 땅은 영구적으로 계속 줄어들게 됩니다. 이 경우가 반복되면 사람이 죄인인지라 여자가 땅을 물려받는 일을 좋아하겠습니까? 여자가 땅을 물려받으면 자꾸 자기 지파의 땅이 줄어들게 됩니다. 그 지파의 사람들은 아무도 여자가 땅을 물려 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면 나중에 이게 또 차별이 될 수 있습니다. “여자한테 땅 줬더니 시집가면서 시댁에 다 가져가버린다. 이 제도가 맞나?” 하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또 여성이 차별의 대상이 됩니다. 이것을 막기 위해 민수기 36:6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슬로브핫의 딸들은 마음대로 시집가려니와 오직 그 조상 지파의 종족에게로만 시집갈지니” 이렇게 하면 슬로브핫의 딸이 시집을 가더라도 므낫세 지파의 땅은 다른 지파에 편입되지 않고 그 지파안에 보존될 수 있습니다. 므낫세 지파는 하나님께 약속받은 것을 잃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슬로브핫의 딸들과 같은 경우가 생겼을 때 그들이 다시는 차별 받지 않도록 하셨고 또 그 지파 입장에서는 약속 받은 것을 잃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이 방법으로 하나님은 영원히 차별 받지 않는 나라를 세우십니다.
(적용) 하나님도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얻길 원하십니다. 복음을 믿는 것외에 그 어떤 다른 조건이 아니라 믿음으로 영원한 나라를 얻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얻는 이 나라는 영원한 나라입니다. 이 나라는 우리에게 어떤 조건이 없다고 해서 빼앗기는 것도 아니고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신실함 때문에 우리는 영원한 나라를 영원히 소유하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는 믿음 외에 어떤 차별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 나라를 소유한 우리는 이웃을 대할 때 차별하지 않습니다. 차별 없는 나라를 소유한 사람이 다른 이들을 차별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관심과 사랑의 사각지대에 있는 사회적 약자들에게 관심을 두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섬겨야 합니다. 그리고 일상에서 우리가 차별하는 삶을 살고 있지 않은지 우리 자신을 돌이켜 봐야 합니다. 성별에 따라, 국가에 따라, 인종에 따라, 빈부에 따라, 학식에 따라, 출신에 따라 차별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이런 실수를 범하지 않아야 합니다. 어려운 이들, 연약한 이들에게는 똑같이 대하는 것이 아니라 더 사랑을 많이 주고 관심을 많이 줘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다른 이들과 공평해집니다. 이런 일은 세상 그 어느 누가 하는 것이 아니라 차별 없는 나라를 소유한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해야 합니다.
결론
주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차별 없는 나라를 베푸시는 분이고 이 땅의 차별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십니다. 우리가 차별의 문제를 어떻게 대하는지 지켜보십니다. 우리는 차별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차별 없는 복음, 차별 없는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차별의 문제에 관심을 두고 차별 받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을 더 잘 섬겨야 합니다. 그렇게 사는 삶이 차별 없는 나라의 백성 된 우리가 살아야 할 삶인줄로 믿습니다. 다함께 찬양하시고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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